철학/근대철학 이차문헌

『에밀』 「5부」 논평

현담 2022. 4. 29. 14:51

국민-되기와 인간으로서 권리

 

  에밀은 소피와 결혼하여 가장으로서 국가의 일원이 되기 전에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기서 가장-되기가 국민-되기인 주요한 이유는, 가장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재산을 형성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의 법을 통해 보호받음과 동시에 그 법을 복종해야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826, 854). 에밀의 여행은 국민을 보기 위해 여행하는 것”(824)인데, 그것은 곧 통치 형태와 풍속과 치안 상태를 연구”(820)하는 일이며, 정부 일반과 특수한 정부들을 연구함으로써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특수한 정부 아래에서 자신이 살기 적합한지”(825)를 연구하는 일이다. 결국 에밀의 여행은 가정을 꾸리고 국민으로 살만한 국가가 어떤 국가이고 그것이 자국인지 판단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에밀이 태어난 국가가 가족과 함께 살면서 국민으로서 활동할만한 국가가 아닐 경우, 에밀은 그 국가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다른 국가에서 살 권리가 있을까? 루소는 그 권리가 있다고 말하며, 그 권리를 누구에 의해서도 폐기될 수 없는 권리”(825)라 부른다. “공동체와 맺고 있는 계약을 마음대로 포기”(825)하거나 자발적으로 자기 나라의 법에 복종함으로써 그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획득”(825)하는 것은 이성의 나이에 이른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되었을 때 행사할 수 있는, 국민 이전의 인간으로서 가지는 권리이다. 현실적으로 법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인 이익과 인간의 정념이 창궐하는 것”(856)을 본 루소는 한 인간이 조국이라는 말뚝에 묶여 죽기 전까지 경멸하는 인간들에게 의존”(826)하고, “끊임없이 타인의 지배 아래”(826)에서 자유를 잃고 예속되는 모습을 자신의 인간학적 체계 내에서 허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루소는 한 인간에게 자신의 조국에서 국민으로 사는 것이 선호될 만한 이유를 마련해 놓았다. 그것은 조국이 인간에게 자연의 선물”(825)로 여겨지는 출생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소는 인간이 그 출생지를 포기할 경우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825)이라고 말하며, 고향의 포기를 함축하는 조국의 포기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자기애를 훼손할 것으로 본다. 나아가 인간은 그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장소에 있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의무 가운데에는 태어난 곳을 사랑하는 것”(857)이 포함되어 있다. 동향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호하고 길러냈기 때문에 어른이 된 그는 그들을 사랑하고 도울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의 수행을 위해선 그가 조국에서 사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유리할 것이다. 다만, “타향에서 더 동향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상황”(858)이 있는데, 탈북 후 고향에 남은 가족과 친척들을 부양하기 위해 한국에서 돈을 벌어 고향으로 송금하는 새터민의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경우는 고향애의 의무를 위하여 조국을 포기하는 예외적인 경우임과 동시에 또다시 국민 이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강조하는 경우이다.

 

  사는 곳이 있는 한 우리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 수밖에 없다. 정부와 법률은 항상 있는 것이다(857). 그리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국민으로서 평화를 누리고 덕목을 사랑하며(857), 국가를 위해 희생을 치르고 목숨을 바쳐야 할 의무를 진다(812). 하지만 우리는 인간인 이상 사는 곳을 떠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곳이 설령 사랑하고 의무를 다해야 할 태어난 곳이라 해도 말이다. 이런 고려 속에서 루소는 인간의 자유를 양심과 이성이라는 인간의 내면에 궁극적으로 위치(856)시킨 후 국민-되기의 과정을 통해 국가를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게끔 허용함으로써 한 인간이 인간적 자유라는 토대 위에서 시민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