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근대철학 이차문헌

『에밀』 「4부」 논평

현담 2022. 4. 16. 15:44

루소의 계층 갈등에 대한 정념적 분석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보면 박탈감(“그가 향유하는 행복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을 느끼며 질투하기 쉽고,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면 안심하며(“그가 느끼는 아픔을 우리에게 면해주는 것 같으며”) 동정하기 쉽다고 말한다(395-396).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나 귀족의 위치에 자신을 놓아보지 않는”(399)데 박탈감과 질투심을 느껴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질투심을 느끼는 사람의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루소는 공통적인 불행은 애정에 의해 우리를 결속한다.”(395)고 말한다. 사람들은 공통적인 불행을 상위 계층에게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남은 상위 계층과의 결속의 끈은 공통적인 욕구를 통한 이해”(395) 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하위 계층이 상류층을 보는 관점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저 인간은 불행이라는 보편적인 조건에서 예외적으로 행복해 보여. 그래서 나는 저 인간을 보면 질투심을 느끼면서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결속도 느끼지 못하겠어. 그와 나의 유일한 결속은 이해관계인데, 저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나에게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나의 행복할 권리를 박탈하며 나를 착취하는 것 같아.”

 

  그런데 그렇다고 상류층이 하위 계층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들 역시 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타인의 불행만 동정”(399)하기에 상류층은 자신들이 면할 수 있는 하위 계층의 가난과 고통에는 동정심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왕과 부자와 귀족은 백성과 빈자와 평민을 멸시함과 동시에 그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402) 상류층이 하위 계층을 보는 관점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와는 전혀 동떨어진 채로 고통을 겪는 저 인간에게는 눈길도 주기 싫구나. 그와 나의 유일한 결속은 이해관계인데, 저 인간은 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봉사하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것 같군.”

 

  정념적 분석을 통한 계층 간 갈등의 이해는 다소 당연하게 보이지만 다음과 같은 함축을 갖는다. 우선, 단순히 상위 계층은 하위 계층을 자비롭게 대하고, 하위 계층은 상위 계층을 존경해라와 같은 당위적인 도덕 명령이 소용없게 된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엄격한 계층 구별이 존재하는 한 계층 간 갈등이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여러 계층이 상호작용하고 협력할 일이 예를 들어, 민회나 정부에서- 아무리 많아도, 그들은 자연스럽게 섞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시기와 멸시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계층 간 갈등의 해소와 그에 따른 사회적 결속의 강화는 계층의 파괴나 적어도 엄격한 계층 구별의 완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루소는 인류는 민중으로 구성되고, 민중이 아닌 소수(상위 계층)는 고려할 필요도 없고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402, 404) 계층 자체를 타파하는 데에 부정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계층의 파괴가 아니더라도 루소에게는 한 가지 길이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위 계층에게 누구나 종사할 수 있는 전원적인 삶”(399)을 살도록 장려하고 그것을 명예롭게 여기는 풍습을 진작시키는 것이다. 이때 하위 계층은 자신이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 여기기에 진정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399) 반면, 상위 계층은 시골사람의 단순하고 고된 삶”(139, 사회계약론)을 통해 고통에 익숙해지면서 동정심을 키우게 되고, “고통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역을 영화로운 높은 자리에서”(400) 바라보기보다는 그들과 같거나 낮은 자리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