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근대철학 일차문헌

루소(1762), 「5부」, 『에밀』

현담 2022. 4. 29. 14:44

pp.646-658.

 

그 유사점과 차이점은 도덕적인 것에 영향을 끼침에 틀림없다. 그 결과는 현저하며, 경험에 일치한다. 그것은 또한 성의 우열이라든지 평등에 대한 논쟁 등의 공허함을 증명하고 있다. 각 성은 자연의 특별한 사명에 따라 그 자연의 목적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에, 만일 한쪽 성이 다른 성을 더 닮았다면 그 성은 더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측면에서 보면 두 성은 평등하다. 그런데 그들이 상이하게 가지고 있는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비교할 수 없다.” (646)

 

성이 결합할 때 각 성은 공동의 목적에 협력하지만, 협력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 방식의 다름으로부터 두 성의 도덕적(윤리적 오역, moral) 관계에 부여할 수 있는 최초의 차이점이 생겨난다. 남성은 능동적이고 강해야 하며, 여성은 수동적이고 약해야 한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오역, ‘그러므로는 없고, necessary는 충분조건-필요조건 맥락에서 필요로 번역하는 게 맞음) 전자는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고, 후자는 저항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646)

 

이 원칙이 확고부동하다면, 여자는 특히 남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남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오역, please) 만들어졌다는 결과가 나온다. 남자 역시 여자의 마음에 들어야 하겠지만, 그 필요성은 덜하다. 남자의 가치는 그의 힘에 있다. [...] 그것은 사랑 그 자체보다 앞서는 자연의 법칙이다. 만일 여자가 남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복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여자는 남자를 자극하지 말아야 하며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한다. 여자의 난폭성은 그녀의 매력에 있다. 바로 그 매력으로 여자는 남자로 하여금 힘을 솟게 해야 하고, 그 힘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647)

 

세간의 평은 남자들에게는 미덕의 무덤이 되지만, 여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왕좌가 된다. [...] 여자가 받는 모든 교육은 남자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 (658)

 

*남성과 여성 : 두 성 사이에는 우열이 없고,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측면에서 보면 두 성은 평등. 그러나, 남성은 지배하고 여성은 복종하며, 남자의 가치는 힘이고, 여자의 가치는 남자의 힘을 증폭시키는 매력임을 고려할 때, 여성을 남성의 보충물 정도로 이해되고 있음. 그리고 그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이 자연적이며 경험에 일치한다고 루소는 말함. 모든 편견과 세론을 떠나 인간을 고찰하고 교육하던 루소는 5에서 편견과 세론이 가득한 여성상을 이야기함.

  그래도 당시로 보았을 때 루소의 여성상이 진보적이었던 면은 우선 여성 측에도 자유연애 및 자발적 결혼을 허용한 것이 있음. 결혼이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으로 생각되던 당시(지금도 마찬가지지만)에는 결혼의 성사에 있어 남자와 여자의 덕성, 성향의 일치, 서로 사랑함, 서로의 결혼하고자 함 등이 고려되지 않은 채 부모의 주도로 오로지 신분과 부만이 고려됨. 특히 여성은 아버지 편에서 소유물이 팔려나가듯이 결혼시켜짐. 그러나 루소는 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봄. 또한 루소는 여성이 쓸데없이 수녀원에 들어가 즐거움을 잃고 살기를 원치 않았고, 노래나 춤과 같은 즐거움을 자연스럽게 누려야 한다고 말함. 나아가 그는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코르셋과 같은 문화를 비판하였고, (비록 남자와 그 방식은 다르고 남자에게 종속적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세심한 교육을 통해 길러져서 충분히 이성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함.

  하지만 아무리 열정적으로 루소가 위와 같은 입장을 고집했다하더라도, 루소에게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고, 남성에게 매력을 부리고, 현실적인 사고를 하면서 가정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따라서 도덕적임. 간단하게 루소를 비판하자면, 우선 루소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여성상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음. 신체의 상대적 약함으로부터 왜 수동성이나 현실적인 사고능력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지 의문이고, 신체가 강건한 여성이나 남성에게만 귀속시켰던 정신적 능력을 가진 현실적 여성들이 너무나 많음. 그리고 만약 여성이 수동적이라 하더라도, 여성이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주장임. 자연주의의 오류. 왜곡된 여성상에서 잘못 도출된 여성적 도덕은 인간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인간 일반의 도덕과 양립 가능한지도 의문. 예를 들어, 세간의 평을 이용해야 하고 남성에 복종해야 하는 여성은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으면 추하고 교양없는 여성이라는 세간의 평과 코르셋을 착용하라고 강요하는 남성에 맞서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신체를 억압하는 잘못된 의복이고 그래서 나는 착용하지 않겠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인간의 도덕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듯함.

 

pp.750-825

 

“‘소피, , 소피! 당신이 바로 내 마음이 찾고 있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당신이 바로 내 마음이 사랑하는 그 사람이란 말인가?’ [...] 그녀의 첫마디에 에밀의 마음은 내려앉는 듯했다. ‘소피다.’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750-751)

 

그는 소피의 그런 모습을 보며 가슴 아픔을 느꼈다. 나는 억지로 그를 데리고 떠났다. 만일 내가 그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더 주면 그는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그런 슬픈 모습을 안고 떠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만일 그가 소피에 대한 의무를 잊으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가 떠날 때 본 그 슬픈 정경을 그에게 환기시켜 줄 것이다.” (816)

 

나라의 풍경을 보기 위해 여행하는 것과 국민을 보기 위해 여행하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 그 정부 하에서 자신이 살기 적합한지를 연구해야 한다.” (824-825)

 

*에밀의 여행 : 첫 번째 여행은 ideal 소피를 가지고 real 소피를 찾는 여행, 두 번째 여행은 소피를 떠나서 하는 여행. 두 번째 여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왜 선생은 에밀을 애써 찾은 소피와 결혼시키는 대신에 그녀로부터 떼어내어 2년 동안 유럽을 돌아다니게 하는가? 1) (소피에 대한) 사랑이라는 강력한 정념을 지배하기 위해, 진정한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2) (소피가 자기 곁에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아가 자신도 소피 곁에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처지(인생의 유한함, 덧없음)에 대해 성찰하면서 인생 그 자체로부터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런 맥락에서 자연적 자유, 정치적 자유, 도덕적 자유를 구별할 수 있음, 도덕적 자유는 궁극적인 독립과 자기 지배) 3) 소피와 결혼하여 가장이 되고 또 사회의 일원이 되기 전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지 연구하기 위해 4) 소피의 성격과 소피와의 사랑을 시험해보기 위해

 

pp.853-857.

 

그래, 그 관찰의 결과는 어떤 것이니? [...] 자연과 법이 부과한 구속 외의 다른 어떤 구속도 자발적으로 더 저 자신에게 부과하지는 않겠습니다. [...] 저는 필연에 저항하기를 바라지 않기에, 저 자신을 구속하는 어떤 것에도 저를 묶어두지 않겠습니다. [...] 여행 도중 저는 제가 절대적으로 저 자신이 될 수 있는 어떤 곳이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 다른 것에는 묶이지 않을 수 있더라도, 적어도 제가 정착할 땅에는 묶이게 될 것 [...] 지배와 자유라는 두 단어는 양립할 수 없기에, 저는 저 자신의 주인이기를 그침으로써만 한 채의 초가집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언제 죽음이 찾아오든 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죽음은 제가 살아왔던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853-856)

 

만일 내가 너에게 시민의 의무에 대해 말하면, 너는 아마 조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내게 물을 것이며, 그러고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 조국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는 있을 것 [...] 자기 나라에 아무런 빚을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이든, 그는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 즉 그의 행위의 도덕성과 덕목에 대한 사랑을 자기 나라의 덕택으로 얻은 것이다. [...] 법은 악한 자들 사이에 있을 때조차도 정의로울 수 있는 용기를 그에게 주기 때문이다. 법이 그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법은 그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 의무 중 하나는 네가 태어난 곳을 사랑하는 것이다. 네 동료 시민(동향 사람 오역, compatriot)들은 너를 보호해주었다.” (856-857)

 

*여행의 결과 : 에밀이 여행을 통해 깨달은 바는 1)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자신이 될 수 있는 곳은 없음. 모든 정치체의 타락을 깨닫고 타락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만 가장이 될 수 있음. 2) 자연의 필연에 저항하기를 바라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구속하는 사물에 자신을 묶어두지 않아야 함. 이 세상 사람들은 자유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들의 자유를 더 소모하고 있었음. 3) 죽음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됨. 죽음은 적어도 자기가 살아왔던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

 

*여행을 보충하는 가르침 : 선생은 에밀이 깨달은 바에 대체로 만족했지만, 시민으로서 의무에 관심이 없는 에밀에게 그에 대해 설명하면서 여행을 보충하는 가르침을 제공. 1) 정치적 관계 속에서만 행위의 도덕성이 가능하고, 덕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음. 2) 법은 공익을 위해 자기 자신과 투쟁하여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가르침. 3) 어렸을 때 보호해준 동료 시민들을 사랑하고 도울 의무가 있음. 따라서 시민의 의무를 싫어하지 않도록 하고 그 의무를 기꺼이 수행해야 함.

 

p.655., p.859.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를 가나 그 두 성이 같은 직무와 같은 일을 하게 함으로써 도저히 견디기 힘든 폐습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는 그 뒤죽박죽의 사회 상태에 대해서이며, 자연의 그 더없이 온유한 감정의 파괴 [...]에 대해서이다. [...]큰 조국에 애착을 갖는 것이 가정이랄 수 있는 작은 조국에 대한 애착을 통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 같으며,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는 훌륭한 시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655)

 

“[...] 어른이 되어 각자 자신의 주인이 되면, 누구에 의해서도 폐기될 수 없는 권리에 의해, 자기가 정착하고 있는 나라를 떠날 때 그가 그 공동체와 맺고 있는 계약을 마음대로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825)

 

에밀, 너에게 힘든 의무들이 부과되더라도, 그토록 평온한 삶으로 말미암아 그 의무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라. 로마인들은 잠시 쟁기를 놓고 집정관직을 수행했음을 기억하라. 최고 통치자나 국가가 조국을 위해 너를 부르면, 네게 주어진 자리에서 시민의 명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일을 중단하라. [...] 그 임무가 네게 오래 남아 있지 않도록 완전하게 그 임무를 이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의무의 곤경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있는 한,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너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859)

 

*에밀의 시민성? : 사회계약론에서는 국가가 시민이 의무를 다해야 할 궁극적 집단으로 보임. 하지만 에밀에서는 남녀-가정-이웃-시민-국가로 넓어지는 동심원 모델을 상정하여 더 작은 집단에서 의무를 다해야 더 큰 집단에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임. 물론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의무를 수행하다가도 국가의 부름을 받으면 시민으로서 의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면 되기 때문에 두 모델이 충돌하지는 않음. , 동심원 모델을 가정하고, 또 에밀이 받은 교육을 고려해보았을 때, 에밀은 적극적인 시민이 될 것 같지는 않음. 심지어 루소는 국가를 포기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에밀은 국가를 포기하고 다른 국가로 가버릴 수도 있음. 이런 상황에서 에밀은 법안 발의에 힘쓰거나, 불의에 대항한다거나, 전쟁에 나가서 열심히 싸우는 시민이 될 수 있을까? 에밀은 농촌에 살면서 속세에 관심 없이 소피와 가족과 함께 옹기종기 살다가 어쩌다 호출당하면 후딱 일을 해치우고 오는 수동적인 시민, 나아가 여차하면 국가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방인 같은 시민이 되지나 않을까? 에밀은 어떤 시민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