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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 첫째 정리 전반부 (『자연법의 토대』 1부 1절) 번역

현담 2023. 10. 16. 16:40

첫째 핵심부

 

법 개념의 연역

 

1: 첫째 정리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에게 자유로운 작용성을 귀속시키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정립할 수 없다.

 

증명

 

  Ⅰ. 만약 하나의 이성적 존재자가 자기를 그러한 것으로서[이성적 존재자로서] 정립해야만 한다면, 그것은[이성적 존재자는] 단적으로 최종적인 근거가 그 자신[이성적 존재자 자신] 내에 놓여 있는 활동성을 그 자신에게[이성적 존재자 자신에게] 귀속시켜야만 한다. (양자는[전건과 후건은] 교환가능한 명제들이다: [다시 말해,] 어느 하나[어느 하나의 명제]는 다른 하나[다른 하나의 명제]가 말하는 바를 말한다.)

  그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활동성 일반은 (자아성, 주관성은) 이성적 존재자의 특징이다. 그 자신의 정립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은) 이러한 활동성[그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활동성]의 작용이다. 이러한 반성[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A라고 불린다[이러한 반성을 A라고 부르자]. 그러한 활동성[그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활동성]의 작용을 통해서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를 정립한다. 모든 반성은 자신의 객관, B를 향함으로서 무언가로 향한다. 그렇다면, 반성 A가 요구하는 객관은 무슨 종류의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 이성적 존재자는 그것[반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정립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객관으로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의[이성적 존재자의] 특징은 자기로 되돌아가는 활동성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그것의[이성적 존재자의] 반성의 최종적인 궁극적 기층 B는 또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활동성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이성적 존재자는] 자기를 이성적 존재자로서는 정립하지 않고, 결코 자기를 정립하지 않는다. 이는[이성적 존재자가 자기를 정립하지 않음은] 전제[이성적 존재자의 특징은 자기로 되돌아가는 활동성임]와 모순된다.

  제시된 이성적 존재자는 유한한 것이다. 그런데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는 제한적인 것 외에는 반성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양 개념들은[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와 제한적인 것 외에는 반성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은] 교환가능한 개념들이고, 어느 하나[어느 하나의 개념]는 다른 하나[다른 하나의 개념]가 뜻하는 바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로 되돌아가는 활동성 B는 제한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 그것[활동성 B] 외부에는 여전히 어떤 C가 주어져야만 하고, 이러한 활동성[활동성 B]이 아니라 그것에[활동성 B] 대립되는 반성하는 자를 통해 정립되어야만 한다.

 

  Ⅱ. 세계직관 내 그것의[이성적 존재자의] 활동성은 이성적 존재자를 그러한 것[세계직관 내 그것의 활동성]으로서는 정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세계직관 내 그것의 활동성은] 아무렴 그 개념에 의하여 직관하는 자[이성적 존재자]로 되돌아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직관 내 그것의 활동성은] 이러한 것이[직관하는 자가] 아니라, 외려 그것[직관하는 자] 바깥의, 그리고 그것에 대립할 무언가를 -[,] 하나의 세계를- 가진다[가지기 때문이다].

  (후에 여기서 벌어지는 행위, [] 직관함은, 물론 이성적 존재자에게 자기 자신에 의하여 귀속될 수 있고, 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자가 직관하는 자로서 자기를 정립할 수 있다. 물론, 초월론적 철학의 관점으로부터 누군가는 더군다나 내다본다, 직관조차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자아일 뿐이며, 세계는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직관한 자아일 뿐임을. 그런데 그때 자아는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하여 거기 있어야만 한다, 무언가를 자기에게 귀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있을 뿐이다. [,] 어떻게 그것은[자아는]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현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는[앞의 물음은] 세계직관으로부터는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후자[세계직관] 자체는 우리가 찾아나선 전자[자아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거기 있음]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Ⅲ. 하지만 동일한 것은[이성적 존재자는] 우리가 찾는 그것과[활동성과] 같은 활동성[자유로운 활동성]을 그것의[활동성을] 제한하는 것이 될 세계에 대립시킬 수 있고, 그것을[활동성을] [세계에] 대립시킬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을[활동성을] 산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활동성이 자기의식의 가능성의 유일한 조건이라면, -그런데 자기의식은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것의 개념에 따라 필연적으로 귀속되어야만 한다- 요청되는 것[그러한 활동성]은 행해져야만 한다.

 

  a) (우리가 자연법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사변과 함께 전진할 때, 철학하는 우리에게는 알려져야만 하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 철학하는 [객관인] 이성적 존재자에게는 아직 알려져야만 하는 것이 아닌,) 세계직관 내 이성적 존재자의 활동성은, (비록 그것의[활동성의] 형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시 말해, 설령 그것이[활동성이] 행해진다 하더라도, 그렇지만 그것의 내용에 따라, 다시 말해, 그것이 일단은 어느 특정한 경우에 행해진 후에) 정확히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강제되고 구속되어서. 우리는 객관들을 다음과 같이 표상시켜야만 한다. [,] 그것들은[객관들은] 우리의 개입이 없는 우리의 견해에 따르는 식으로 [표상시켜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표상함은 그것들의[객관들의] 존재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성[객관들을 표상하는 활동성]에 대립되는 활동성은 그것의 내용의 고려에서 자유로워야만 한다. [객관들을 표상하는 활동성에 대립되는 활동성은] 이렇게, 혹은 다르게, 혹은 또 다르게 행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자유로운 활동성은, 세계직관 내 활동성을 통해 제한되어야 한다. , 세계직관 내 활동성은 그 자체로 구속의 상태에서의 저 자유로운 활동성이다. 그리고 역으로, 자유로운 활동성은 구속이 탈락한 경우의 세계직관 내 종사하는 것[활동성]이다. 객관들은 객관들이다, 다만 다음을 통해서 그리고 다음일 경우. 그것들은[객관들은]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성을 통해 현존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자유로운 활동성은] 중지되고 제약되어야만 한다, 그것들이[객관들이] 거기 있으려면. 그런데 자유로운 활동성은 객관들을, 그것들이[객관들이] 그것을[자유로운 활동성을] 구속하는 이상, 무효로 하는[지양하는] 것에 전념한다. 따라서, 그것은[자유로운 활동성은] 객관들을 향하는 작용성이다. 그리고 직관은 무효화된[지양된], [] 이성적 존재자 자신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단념된 작용성이다.

  이것은 세계직관과 세계 자체와 관련하여 정립될 활동성 B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활동성 B] 필연적으로 이성적 존재자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감이다. 그리고 그것이[활동성 B] 객관들을 향하는 한, 그것은[활동성 B] 이러한 것이[되돌아감이] 아니다. 그런고로 그것은[활동성 B], 이성적 존재자 자체에 참조하는, 작용성을 위한 자유로운 자기규정이어야만 한다. 그것이[활동성 B] 객관을 향하는 한에서, 그것은[활동성 B] 그것의[활동성 B] 내용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 이는 그것이[활동성 B] 마땅히 근원적으로, 그리고 그것의 본질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고로, 그것은[활동성 B]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되고, 규정되는 동시에 규정하며, 그런고로, 참으로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활동성이다.

  지금 말해진 바를 다음과 같이 현시하는 것은 체계적이다. 설명되는 활동성은 직관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왜냐하면 후자는[직관은] 구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되는 활동성은] 이성적 존재자를 향하거나, 동일한 말해지는 바는[똑같은 것을 달리 말하자면], 그 활동성은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자와 그것의 활동성은 하나이고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후자는[직관은] 이성적 존재자 외부의 무언가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설명되는 활동성은] 우리 외부에 수립된 하나의 작용성[이라는], 혹은 하나의 목적[목적이라는] 개념의 형성이다. 동시에 그것은[활동성은] 직관에 연관되는 것, 즉 동일한 것으로 같이 정립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활동성은] 객관을 향한 작용성이다. 하지만 아무렴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것은 [대상을 향한 작용성은] [목적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무매개적으로[직접적으로] 따라나오고 하나의 다른 관점에서 주시될 뿐인 [직관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b) 그러한 활동성을 매개로 요청되는 자기의식이 가능해진다. 그것은[그러한 활동성은] 자신의 궁극적 근거를 이성적 존재자 자체 안에 가지는 것이며, 그것[이성적 존재자] 안에 자신의 근거를 가지지 않는 그러한 것의[에 대한] 가능한 대립을 매개로 정립되는 것이다. 자아는 (이성적 존재자 자신은, [, 자아] 자체는) 이제 제한되고 규정된 것이 될 것이며, 그리고 그 때문에 반성을 통해 파악될 것이다. 다시 말해, 실천적 자아는 반성에 대한 자아가 될 것이다. [반성에 대한 자아는] 자기 자신을 통해 정립된, 그리고 반성 속에서 자기를 통해 정립되는 자아[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는 논리적 주관으로서 어떤 가능한 술어 속에서 무언가가 부여될 수 있다, 여기서 세계직관처럼[세계직관이 자아에게 부여된 것처럼].

 

  c) 오직 그러한 활동성을 매개로만 자기의식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체계적으로 현시가] 행해진 것 속에는 우리가 위에서 자기의식의 조건들로서 설명되었던 특징 외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로 되돌아가는 활동성이 있다거나 그러한 것[활동성]은 이성적 존재자 자체 안에 그것의 궁극적 근거를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것[활동성]은 유한하고 제한된 것이고, 대립과 [그것을] 제한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제한된 것으로서, 그리고 단지 다음을 통해서, 그야말로 그것을 반성한다는 것을[사실을] 통해서 일어난 것으로서, 정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활동성, 그리고 같은 것의[그러한 활동성의] 정립은 필연적으로 상정된다, 자기의식이 상정되는 것처럼, 그리고 두 개념들은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