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고대철학 일차문헌

플라톤, 「철학자와 죽음」(61c-69e), 『파이돈』

현담 2022. 5. 6. 18:45

<2부 목차>

 

2-1. 자살의 허용 여부에 관한 논의 (61c-63e)

2-2. 철학자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다는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론 (63e-69e)

 

2-1. 자살의 허용 여부에 관한 논의 (61c-63e)

 

그렇다면 에우에노스도, 그 일에 종사한다고 할 만한 모든 사람들도 그러려 할 걸세.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해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라고들 하니까.” (61d)

 

소크라테스, 스스로를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인데 철학자는 죽은 사람을 따르려 할 거라고 어떻게 말씀하실 수가 있는 거지요?” (61e)

 

자살 금지에 대한 의문

 

1. 철학자는 죽고자 한다.

2. 그러나, 철학자는 자살해서는(스스로를 해쳐서는/스스로 죽어서는) 안 된다.

 

왜 철학자는 자살하는 방식으로는 죽으면 안 되는가? (2.에 대한 의문)

자살은 안 되지만 죽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1.에 대한 의문)

 

자살 금지에 대한 해명 (2.에 대한 해명)

 

1. 인간은 신()의 소유물이다. (=()은 인간의 주인이다)

2. 소유물은 자신의 주인이 처분의 표시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처분하면 안 된다.

3. 인간이 자살하는 것은 소유물이 자신의 주인이 처분의 표시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처분하는 것이다.

4. 따라서, 인간은 자살하면 안 된다.

 

늘 케베스는 어떤 논변을 추적한다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하건 결코 곧장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고 말이지.”

 

그리고 케베스는 제 생각에 당신을 향해 논변을 당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냥의 비유 : 철학하기는 사냥과 유사. 상대방 논변의 흐름을 추적하다가, 적절한 지점에서 자기 논변을 활처럼 당겨 비판의 화살을 쏘아 상대방 논변을 쓰러뜨리고자 함.

 

철학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 대한 의문

 

1. 인간은 신의 소유물이다.

2. 자신의 주인이 좋은 주인이라면, 소유물은 주인 곁에 머무르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고 떠나는 것을 노여워해야 한다.

(=자신의 주인이 좋은 주인이라면, 소유물은 주인 곁에 머무르고자 해야 하고 떠나는 것을 피하고자 해야 한다.)

3. 신은 인간의 좋은 주인이다.

4. 그러므로, 인간은 신 곁에 머무르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고 떠나는 것을 노여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 곁에 머무르고자 해야 하고 떠나는 것을 피하고자 해야 한다.)

5. 철학자는 인간이다.

6. 신 곁에 머무르는 것은 삶이고 신 곁을 떠나는 것은 죽음이다.

7. 따라서, 철학자는 삶을 즐거워해야 하고 죽음을 노여워해야 한다.

(=따라서, 철학자는 살고자 해야 하고 죽음을 피해야 한다.)

8. 그러나, 철학자는 죽음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철학자는 죽고자 한다.)

 

왜 철학자는 죽음을 노여워하지 않고 즐거워하는가? 왜 철학자는 죽고자 하는가? (자살 금지에 대한 두 번째 의문의 변주)

 

철학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 대한 해명

 

1. (신의 보살핌/돌봄을 받다가 비로소) 신 곁으로 가는 것이 죽음이다.

2. 따라서, 철학자는 죽음을 즐거워해야 한다.

(=따라서, 철학자는 죽고자 해야 한다.)

3. 그래서, 철학자는 죽음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죽고자 한다.)

 

2-2. 철학자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다는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론 (63e-69e)

 

왜냐하면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죽은 목숨인지, 어떤 점에서 죽을 만한지, 그리고 어떤 죽음에 대해서 그러한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거든. , 그들은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 이야기를 해 보세.” (64c)

 

철학자가 어떤 죽음에 대해서 죽을 만한지에 대한 해명

 

자살 금지에 대한 해명

철학자는 신이 내려보내는 필연에 의한 죽음에 대해서 죽을 만하다. (“신이 지금 내게 주어진 것과 같은 어떤 필연을 내려보내기 전에 자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 [...]” (62b))

 

철학자가 어떤 점에서 죽은 목숨인지에 대한 해명

 

1. 죽어 있음은 몸은 영혼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로 있게 되고, 영혼은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로 있게 되는 것이다.

2. 철학자는 영혼을 몸으로부터 최대한 분리되게 한다.

  2-1. 철학자는 육체적 즐거움(먹을 것, 마실 것, 성행위 등)을 멀리한다.

  2-2. 철학자는 몸을 돌보는 데 쓰이는 것들(옷, 장신구 등)을 하찮게 여긴다.

3. 따라서, 철학자는 죽어 있음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있다.

 

그러면 있는 것들 중 어떤 것이 어디에서인가 영혼에게 분명해진다면, 그건 아마도 추론함 속에서가 아니겠는가?” (65c)

 

우리는 정의로운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있다고 하는가? [...] 나는 큼, 건강, , 그리고 한마디로 다른 모든 것들의 존재, 즉 각각의 것이 그것인 바에 대해서 말하는 걸세.” (65d)

 

*있는 것들(ta onta) :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 혹은 존립하는 사태 일반을 지칭하는 표현. 문법적으로 중성 복수 주격 관사인 ‘ta’와 영어의 ‘being’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on’의 중성 복수 주격 형태인 ‘onta’의 결합물. (역자주)

 

*그 자체로 : 이데아 도입. 플라톤은 종종 이데아(idea)’ 대신 형상(eidos)’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고, 이 구절이 보여 주듯이 ‘X자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함. (역자주)

 

*존재(ousia) :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einai’ 동사의 여성 분사형 ‘ousa’에서 파생된 명사. ‘ousia’는 훗날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그 맥락에서는 통상 실체로 번역됨. (역자주)

 

*각각의 것이 그것인 바(ho tynchanei hekaston on) : 각각의 X에 대해서, 그것을 X이게(being X) 만들어 주는 것, 예를 들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게, 좋음을 좋음이게, 정의로움을 정의로움이게 만들어 주는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표현.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각 Xousia가 됨. (역자주)

 

철학자가 어떤 점에서 죽을 만한지에 대한 해명

 

1. 철학자는 이데아를 알고자 한다(현명함을 획득하고자 한다).

2. 몸의 감각에서는 이데아가 분명하지 않다.

3. 영혼의 추론에서는 이데아가 분명해진다.

4. 알고자 하는 대상을 분명하지 않게 드러내는 방식을 배제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방식만을 사용해서야 알고자 하는 대상을 알 수 있다.

5. 그러므로, 몸의 감각을 배제하고 영혼의 추론만을 사용해서야 이데아를 알 수 있다.

6. 그러므로, 철학자는 몸의 감각을 배제하고 영혼의 추론만을 사용해서 이데아를 알고자 한다.

7. 몸의 감각을 배제하고 영혼의 추론만을 사용하는 상태는 영혼이 몸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이다.

8. 영혼이 몸으로부터의 완전히 해방된 상태는 죽음이다.

9. 따라서, 철학자는 죽음으로써 이데아를 알고자 한다.

(나아가, 철학자는 살아있는 한 죽음에 최대한 근접함으로써 이데아를 알고자 한다.)

 

앞서 철학자가 죽어 있음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있는 이유를 밝힘

철학자는 이데아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을 만함

 

이건 덕을 위한 올바른 교환이 아니지 싶어서 말이야. 즐거움들을 줄거움들로, 고통들을 고통들로, 두려움들을 두려움들로, 마치 주화들처럼. 더 큰 것을 더 작은 것으로 교환하는 일 말일세.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교환되어야 할 올바른 주화는 오직 현명함뿐이며, 이것만큼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것들이 사고 팔릴 때, 그것이 진정으로 용기이고 절제이고 정의이고 요컨대 현명함을 동반한 참된 덕일 걸세. [...] 사실인즉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의 정화 상태가 절제와 정의와 용기이고, 현명함 자체는 어떤 정화의식이 아닐까 하네.” (69a-69c)

 

*정화 상태(katharsis)와 정화의식(katharmos) : 현명함을 제외한 덕들은 정화 상태에, 현명함은 정화의식에 비유되고 있음. 이것은 현명함을 수반하지 않는 어떤 탁월한 영혼의 상태도 진정한 의미의 덕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바로 앞의 주장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음. , 이 구분을 통해서 현명함은 단순히 진정한 덕에 수반하는 어떤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덕들을 진정한 덕으로 만드는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이 됨. (역자주)

 

일반인(철학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덕

 

1. 일반인에게 죽음은 크게 나쁜 것이다.

2. 크게 나쁜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 크게 나쁜 것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견딜 수 있다.

3. 그러므로, 일반인은 죽음보다 더 크게 나쁜 것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딜 수 있다.

4. 일반인의 용기는 죽음보다 더 크게 나쁜 것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는 것이다.

 

1. 일반인의 덕은 더 큰 것(즐거움, 고통, 두려움 등)을 더 작은 것(즐거움, 고통, 두려움 등)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2. 덕이 크고 작은 그러한 것(즐거움, 고통, 두려움 등)을 교환하는 한 그것은 참된 덕이 아니다.

3. 따라서, 일반인의 덕은 참된 덕이 아니다.

 

철학자의 덕

 

1.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1.` 죽음은 오히려 좋은 것이다.)

2. 철학자는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님을 안다.

(2.` 철학자는 죽음이 오히려 좋은 것임을 안다.)

3. 나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나쁘지 않은 것을 아는 한 견딜 필요가 없다.

(3.` 좋은 것은 그것이 좋다는 것을 아는 한 오히려 추구해야 한다.)

4. 그러므로, 철학자는 죽음을 견딜 필요가 없다.

(4.` 철학자는 죽음을 오히려 추구해야 한다.)

5. 철학자의 용기는 죽음을 견딜 필요가 없는 것이다.

(5.‘ 철학자의 용기는 죽음을 오히려 추구하는 것이다.)

 

1. 철학자의 덕은 그러한 것(즐거움, 고통, 두려움 등)을 현명함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1.` 철학자의 덕은 현명함이라는 정화의식을 통한 그러한 것(즐거움, 고통, 두려움 등)으로부터의 정화 상태이다.)

2. 덕이 그러한 것을 현명함으로 교환하는 한 그것은 참된 덕이다.

(2.` 덕이 그러한 것으로부터의 정화 상태인 한 그것은 참된 덕이다.)

3. 따라서, 철학자의 덕은 참된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