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고대철학 일차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제6권」 9-13장, 『니코마코스 윤리학』

현담 2022. 5. 30. 01:23

<6권 목차>

 

1장 올바른 이성

2장 성격적 탁월성과 사유

3장 학문적 인식

4장 기예

 

5장 실천적 지혜

6장 직관적 지성

7장 철학적 지혜

8장 실천적 지혜의 유형

 

9장 잘 숙고함

10장 이해력

11장 실천적 지혜와 개별적인 것

12장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

13장 실천적 지혜와 성격적 탁월성

 

9장 잘 숙고함 (1142a33-1142b35)

 

Main Question : “‘잘 숙고함’(euboulia)이란 무엇인가?”

- 숙고한다는 것 : 어떤 부분에 있어서만 탐구한다는 것 (탐구한다는 것의 일종이지만 같지 않음)

- 잘 숙고한다는 것(잘 숙고함) : 숙고(한다는 것)의 일종, 올바르게 숙고하는 것

- 1) 그것은 학문적 인식인가? 2) 그것은 의견인가? 3) 그것은 잘 짐작하는 것인가? 4)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아래에서 1), 2), 3), 4) 순서대로 검토하지는 않음)

 

우리는 잘 숙고함’(euboulia)이 무엇인지도 파악해야만 한다.”(1142a36-37)

 

(Subordinate Question 1 : “숙고함이란 무엇인가?”)

- 아리스토텔레스는 1) ~ 4)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 비교의 대상들을 대체로 잘 숙고함과 비교하지 않고 숙고함과 비교함 (2)4)에서는 잘 숙고함이 숙고함과 같이 비교되기도 함)

-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숙고함이 무엇인지 탐구한 후 더 좁혀서 잘 숙고함 혹은 올바르게 숙고함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임

 

먼저 숙고가 무엇인지, 또 무엇과 관련하는지 탐구해야 할 것이다.”(1142b17)

 

1) “그것은 학문적 인식인가?” - “아니다.”

: 학문적 인식의 대상에 관해서는 탐구하지 않지만, 숙고의 대상에 관해서는 탐구하고 이성적으로 헤아리기 때문 (본문에서는 학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들숙고하는 사람을 대조)

 

3) “그것은 잘 짐작하는 것인가?” - “아니다.”

: 잘 짐작하는 것은 이성적인 따짐 없이 비교적 빠르게 되지만, 숙고는 오랜 시간 동안 하는 것이기 때문 (, 숙고한 결과는 빨리 실행에 옮겨야 함) (잘 짐작하는 것의 일종인 빠르게 생각함도 당연히 잘 숙고하는 것이 아님)

 

2) “그것은 의견인가?” - “아니다.”

: 의견의 올바름은 곧 참이고, 의견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숙고의 올바름은 곧 참이 아니고, 숙고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

 

4)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 “그것은 사유(dianoia)의 일이다.”

: 의견은 탐구가 아니라 이미 어떤 종류의 주장(phasis)인 반면, 숙고는 무엇인가 탐구하면서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 아직 주장은 아닌, 합리적 추론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사유의 일이라는 결론

 

(Subordinate Answer 1 : “숙고함이란 다음과 같다.”)

: 탐구하고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것, 오랜 시간 동안 하는 것,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아직 주장은 아닌 것(그래서 숙고의 올바름은 곧 참은 아님), 합리적 추론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 사유(dianoia)

 

(Subordinate Question 2 : “잘 숙고함에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 아리스토텔레스는 1) ~ 4)의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숙고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답을 얻게 되었고, 이제 그것의 올바름에 대해서 탐구하여 비로소 잘 숙고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함

- 올바름은 다양한 행위에 있어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남. 올바름이 잘 숙고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양상인지 규정할 수 있어야 함

 

잘 숙고한다는 것은, 따라서 숙고에 있어서 일종의 올바름이다. [...] 그런데 올바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잘 숙고함에서의 올바름이 그 모든 의미에서의 올바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1142b17-19)

 

*자제력 없는 사람과 나쁜 사람의 올바른 숙고 vs. 잘 숙고함에 있어서 올바른 숙고

: 전자는 이성적 헤아림을 통해 자신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세운 목적을 달성하는 한에서는 올바르지만 큰 악을 취하게 될 것. 그러나 후자는 좋은 것을 성취하게 됨.

 

*그릇된 추론 vs. 잘 숙고함

: 전자는 그릇된 중간항[매개]을 통해 좋은 것(해야만 하는 올바른 것)에 도달함. 그러나 후자는 마땅히 통해야 할 과정(올바른 중간항[매개])을 통해 좋은 것(해야만 하는 올바른 것)에 도달함.

 

*오랜 숙고함 vs. 잘 숙고함

: 전자는 오랜 시간 숙고해서 (좋은 것에) 도달함. 그러나 그것은 아직 잘 숙고하는 것은 아님. (후자는 짧은 시간 숙고해서 좋은 것에 도달함)

 

Q : 숙고는 오랜 시간 동안 하는 것이라면서?
A : 숙고 자체는 잘 짐작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하는 것이지만, 숙고의 일종인 잘 숙고함은 숙고 자체 내에서는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좋은 것에 도달하는 것. , 숙고는 숙고와 유사한 것들과 비교할 때 오랜 시간 동안 하는 것이지만, 잘 숙고함은 다른 숙고들과 비교할 때 짧은 시간 동안 하는 것.

 

(Subordinate Answer 2 : “잘 숙고함에서 올바름이란 다음과 같다.”)

: 좋은 것을 성취, 올바른 중간항[매개]를 통함,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함

 

Main Answer : “잘 숙고함이란 다음과 같다.”

: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올바른 중간항[매개]을 통해 좋은 것을 성취하는 식으로 올바른, 사유의 일종

 

잘 숙고한다는 것은 유익함에 따른 올바름이자 마땅히 도달해야 할 것, 마땅히 해야 할 방식, 마땅히 해야 할 시간에 따른 올바름이다.” (1142b27-28)

 

 

10장 이해력 (1142b36-1143a19)

 

(Main Question : “이해력(synesis) 혹은 좋은 이해력(eusynesia)이란 무엇인가?”)

- 앞서 9장의 Main Question잘 숙고함이란 무엇인가?”였고 Subordinate Question숙고란 무엇인가?”였음. 그러나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해력(comprehension)과 좋은 이해력(good comprehension)을 같이 묶어서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탐구하는 것으로 보임. 그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밝힘. “‘이해력 있다는 것은 좋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이해력 있는 사람좋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1143a10-12) 여기서 우리말에서 재치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음. “너 재치 있다!”라고 할 때 우리는 가 재치 자체를 가졌거니와 좋은 재치를 가졌다고도 생각함. 하지만 반대로 너 재치 없네.”라고 할 때 우리는 가 재치 자체를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나쁜 재치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음. 재치 자체는 그것이 좋은 양상으로밖에 발생할 수 없기 때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해력 개념도 마찬가지로 보임.

 

*“그것은 학문적 인식이나 의견인가?” - “아니다.”

: (학문적 인식이나 의견은 모든 이들이 다 가진 것이지만, 이해력은 모든 이들이 다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

 

*“그것은 개별적인 학문적 인식들 중의 하나인가?” - “아니다.”

: (개별적인 학문적 인식들(의학이나 기하학)은 언제나 그런 것들, 또 변하지 않는 것들, 혹은 생겨나는 것들 중 어떤 것이든 관계하지만,) 이해력은 그런 것들과 관계하지 않고 오직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숙고할 수 있는 대상들에만 관계하기 때문

 

*“그것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 “아니다.”

: 실천적 지혜의 대상이 되는 것들과 동일한 것들()에 관계하는 것은 맞음. 그러나 실천적 지혜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명을 내리는 것(epitaktikē)이며 그것이 목적임. 반면 이해력은 오로지 판단을 내리는 것(kritikē)일 뿐이기 때문.

 

Q : 명을 내리는 것(prescriptive)과 판단(judge Irwin, discriminative Broadie & Rowe)을 내리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A : 명을 내리는 것은 내가 무슨 행위를 해야 한다고 혹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이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무슨 행위가 어떤 행위인지를 따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실천적 지혜가 명을 내리는 것 : ‘네가 그의 화를 누그러뜨려야 하니, 너는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 vs. 이해력이 판단을 내리는 것 : ‘만약 네가 그에게 사과한다면, 그의 화는 누그러질 것이다.’ (Irwin, 1999, 249)

 

*“그것은 실천적 지혜를 획득하는 것인가?” - “아니다.”

: 이해는 배워 아는 것’(manthanein)(learning Irwin, to see the point Broadie & Rowe)에서 성립하는 이해로부터 연유한 것. ‘배워 아는 것무언가를 처음으로 배우는 과정무언가에 대해 파악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후자의 의미(학문적 인식을 활용하는 경우”, “의견을 사용해서 판단하는 경우)로 한정시키고 있음(Irwin, 1999, 249. Broadie & Rowe, 2002, 377.) 그래서 이해가 배워 아는 것에서 비롯되고, ‘배워 아는 것이 대상을 알고 활용하는 것인 한 대상을 획득하는 것일 수가 없음.

 

(Main Answer : “이해력 혹은 좋은 이해력이란 다음과 같다.”)

: 오직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숙고할 수 있는 대상들에만 관계하는 것(=실천적 지혜의 대상이 되는 것들과 동일한 것에만 관계하는 것)(그래서 이해력은 모든 이들이 다 가진 것은 아님), 오로지 판단을 내리는 것, ‘배워 아는 것’(대상을 알고 활용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

 

 

11장 실천적 지혜와 개별적인 것 (1143a20-1143b16)

 

이해심(gnomē)과 공감적 이해(syngnomē)

- 내용 요약 : 공감적 이해는 훌륭한 사람의 올바른 판단(이해심)을 가져오는 것

- Irwin(1999, 249-250)은 이해심(consideration)과 공감적 이해(considerateness)(sympathy Broadie & Rowe)를 다루는 제11장의 첫 문단이 다른 지적 탁월성을 다루는 장들과 동등한 별개의 장으로 다루어졌어야 한다고 말함. 이해심이란 무엇인가?”, “공감적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심과 공감적 이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해심 및 공감적 이해와 훌륭함(decency, 510장에서 다뤄짐)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다른 지적 탁월성에 관한 의문에 대한 설명 대비 매우 불충분

- Broadie & Rowe(2002, 377)에 따르면, 이해심(sense)은 참거짓(true or false)을 가르는 어떤 판단이라도 의미할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굳이 올바른(correct) 판단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 훌륭함(reasonableness, 510장에서 다뤄짐)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할 것. 강상진 외(2011, 224)에 따르면, 훌륭함은 510장에서 언급되었듯이 성문법의 불가피한 한계를 교정하는 준거로서 근원적 공정성이라는 보다 전문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음. 그러므로, 공감적 이해를 갖는 것이 훌륭한 것”(1143a23)인 이유는 법이 규정한 원칙으로 다 규정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 사태의 정황을 참작해서 이해심을 갖고판단”(강상진 외, 2011, 225)해야만 그러한 근원적 공정성에 도달한다는 차원에서 훌륭한 사람의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임.

 

이해력(synesis), 이해심(gnomē), 실천적 지혜(phronēsis), 지성(nous)

- 이해심, 이해력, 실천적 지혜, 지성은 모두 최종적인 것들이자 개별적인 것들에 관련하기 때문에 그 능력들을 동일한 사람들에게 적용함

-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관계하는 것들(최종적인 것들이자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판단 능력이 있을 때 이해, 이해심, 공감적 이해를 발휘한다고 함

정리하자면, 이해력, 이해심, 실천적 지혜, 지성은 모두 같은 것(최종적인 것들이자 개별적인 것들)에 관련함. 그러나 실천적 지혜는 명하는 것(10)이고, 이해력과 공감적 이해/이해심은 판단하는 것(10, 11).

(Following Question 1 : “최종적인 것들이자 개별적인 것들은 무엇인가?”)

(Following Question 2 : “지성은 최종적인 것들이자 개별적인 것들에 어떻게 관련하는가?”)

 

(Following Answer 1 : “최종적인 것들이자 개별적인 것들은 행위될 수 있는 것들이다.”)

(Following Answer 2 : “지성은 최종적인 것들이자 개별적인 것들에 양방향에서 관련한다.”)

- 행위될 수 있는 것들(the things achievable in action Irwin, everything that is done Broadie & Rowe)은 보편적인 것들(universals)에 대비되는 개별적인 것들(particulars)이자 최종적인 것들(the last things). Irwin(1999, 250)전함을 무장하는 데에 있어 과도한 내보임은 피해야 한다.’는 일반적 원칙이 있다면, 이 전함을 무장하는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파악(some grasp)이 있어야만 일반적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예시를 듦. 이러한 종류의 파악은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것들로 출발하는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것들로부터 도달하는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이중적으로 최종적이며 또한 개별적. 또한 이러한 파악의 내용은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일반적 행위 원칙에 도달하고 또 그것을 적용하여 구체적으로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행위될 수 있는 것들.

- 위와 같은 파악이 곧 지성(understanding Irwin, intelligence Broadie & Rowe)의 기능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지각(aisthēsis, perception)”(1143b5)이라고 표현. 지성이 양방향에서 기능한다는 것은 최종적인 것들의 두 가지의 의미에 대응. , 한편으로는 개별적인 것들에서 보편적인 것들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것들을 개별적인 것들에 적용함.

 

경험(짬밥)의 중요성

- 아리스토텔레스는 11장 마지막에서 이해력, 이해심, 지성 같은 것들이 사람이 나이가 차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음. 이는 군대에서 2년 동안 다양한 사역과 훈련을 겪으면서 짬이 차면(병장이 되면) 짬밥으로 이 사역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이 훈련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고 능숙하게 실천에 옮기는 모습과 비슷해 보임. 사람은 인생에서 오랜 세월 다양한 상황을 겪으면서 경험이 쌓이게 되고(노인이 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개별적인 것들을 지각하고 판단하여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됨.

 

이해심이나 이해력, 직관은 자연적으로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의 징표는, 우리가 이것들을 일정한 나이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실제로] 그 나이가 되면 마치 자연이 원인이나 되는 듯이 직관을 갖고 이해심을 가진다는 사실이다.”(1143b7-10)

 

 

12장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 (1143b17-1144a37)

 

Main Question :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는 무슨 쓸모가 있는가?”

 

그런데 이것들[즉 영혼의 여러 탁월성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에 관해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과연 무엇 때문에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1143b17-22)

 

(Subordinate Question 1 : “철학적 지혜는 무슨 쓸모가 있는가?”)

- 철학적 지혜는 생성(genesis)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생성하는 것들) 중 어떤 것도 탐구하지 않음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아닌데 왜?”

 

(Subordinate Question 2 : “실천적 지혜는 무슨 쓸모가 있는가?”)

- 실천적 지혜는 인간을 위해 정의롭고 고귀하고 좋은 것들을 탐구하기는 하지만, 이것들을 앎으로써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실천적인(더 잘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님(ex. 윤리 교사의 범죄). 그리고 신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다면, 이미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을 것이고,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실천적 지혜를 가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것. 인간이 더 잘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어 보이고, 이미 가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르기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왜?”

 

Main Answer :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는 다음과 같은 쓸모가 있다.”

 

1) Answer 1

: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는 영혼의 각 부분의 고유한 탁월성이기에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함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는 영혼의] 각 부분에 고유한 탁월성이기에, 설령 양자 모두 만들어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반드시 선택할 만한 것임을 말해두도록 하자.” (1144a1-3)

 

Q : 영혼의 각 부분에 고유한 탁월성이면 왜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가?
A :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함에서 나오는 행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

 

2) Answer 2

: 탁월성 전체의 한 부분인 [철학적] 지혜(sophia)는 행복을 만들어냄 (이는 실천적 지혜도 마찬가지일 것. 그러나 실천적 지혜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 더 복잡함)

(Subordinate Answer 1 : “철학적 지혜를 가진다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은 맞다. 그러나 철학적 지혜를 가지는 것은 인간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라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 또한 맞다. 결국 철학적 지혜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쓸모 있다.”)

 

“[...] [철학적] 지혜(sophia)는 행복을 만들어 낸다. 탁월성 전체의 한 부분인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활동시킴으로써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1144a4-6)

 

3) Answer 3

: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실천적 지혜 성격적 탁월성에 따라 성취됨. (, 실천적 지혜와 성격적 탁월성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이 작동해서 우리 인간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음. 같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음.) [성격적] 탁월성은 [우리가 바라보는] 목표를 올곧게 해 주며, 실천적 지혜는 이 목표에 이바지하는 것들을 올곧게 해 줌. (이렇게 실천적 지혜는 성격적 탁월성과 함께 행복을 만들어냄.)

(Subordinate Answer 2 : “실천적 지혜는 성격적 탁월성과 함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쓸모 있다.”)

 

Subordinate Question 2` : “실천적 지혜는 인간이 더 잘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과연 아닐까?”

- 성격적 탁월성과 실천적 지혜를 별개의 것으로 상정하고 성격적 탁월성만이 인간을 더 잘 실천적으로 만든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적 의문. Answer 3 혹은 Subordinate Answer 2에서 이미 그러한 주장이 틀렸음을 밝혔지만 새삼 이런 의문을 던지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충적인 설명을 하고 싶은 것.

 

*합리적 선택, 성격적 탁월성, 실천적 지혜

- Braodie & Rowe(2002, 382)에 따르면, 합리적 선택(decision)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 어떤 목표를 위해 내리는 결정.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격적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에 있어서 목표를 올바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지만 수단을 관장하는 것은 영리함(deinotēs)이라고 말함.

- 실천적 지혜는 영리함은 아니지만, 영리함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실천적 지혜를 위한 실천적 추론의 출발점(목적이자 최고선)은 좋은 사람에게만 보임. 따라서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1144a36) (결국 실천적 지혜는 좋은 사람의 영리함 혹은 목표가 고귀한 것일 때의 영리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Subordinate Answer 2` : “실천적 지혜는 합리적 선택에 있어서 고귀한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고귀한 목표 자체를 설정하는 성격적 탁월성과 함께 인간을 더 잘 실천적으로 만든다.”)

 

 

13장 실천적 지혜와 성격적 탁월성 (1144b1-1145a13)

 

실천적 지혜 : 영리함 ≒ ⓐ엄밀한 의미에서의 탁월성 : 자연적인 탁월성

- 자연적인 탁월성 : 나면서부터 갖는 정의로운 품성, 절제 있는 품성, 용감한 품성 등. 어린이나 동물들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지성 없이는 분명 해를 끼칠 수 있는 것. Broadie & Rowe(2002, 383)에 따르면, 훈육을 통해 획득하게 되는 품성상태를 포함한 실천적 지혜로 마무리되지 않은 어떠한 좋은 품성상태라도 담지하고 있는 곳(place-holder)일 수 있음.

- 엄밀한 의미에서의 탁월성 : 지성을 갖추게 되면 () 유사한 것이지만 행위에 있어서 () 차이를 보이는 것(정의로운 품성, 절제 있는 품성, 용감한 품성 등). 실천적 지혜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

 

Q : 13장의 첫 대목에서 왜 탁월성을 , 로 구별하는가? 단지 실천적 지혜와 영리함의 구별 혹은 그것들의 관계에 영감을 받아서?
A : Irwin(1999, 254)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12장에서는 실천적 지혜가 탁월성을 요구하는 것을 논하였으니, 13장에서는 탁월성이 실천적 지혜를 요구하는 것을 논하려 함.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12, 1144a36-37)

 

“[...] 엄밀한 의미의 탁월성은 실천적 지혜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13, 1144b17)

 

따라서 지금까지 논의한 것으로부터 실천적 지혜 없이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또 성격적 탁월성 없이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13, 1144b30-33)

 

Q : 그런데 실천적 지혜가 탁월성을 요구하고 탁월성이 실천적 지혜를 요구한다면 선결문제의 오류 또는 순환논증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가?
A : 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발전하는 시계열 속에서,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탁월성에 미치지 못하는 자연적인 탁월성과 실천적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 영리함을 가지는데, 그가 경험을 점점 쌓고 지성을 더 잘 발휘하게 되면서(더 잘 지각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엄밀한 의미에서의 탁월성과 실천적 지혜를 동시에 획득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

 

(Main Question 1 : “탁월성은 실천적 지혜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탁월성은 실천적 지혜인가?”)

 

False Answer : “탁월성은 실천적 지혜이다.” (소크라테스)

Main Answer 1 : “탁월성이 실천적 지혜인 것은 아니다.”

- 탁월성이 실천적 지혜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실천적 지혜도 탁월성을 요구하기 때문

- 탁월성은 올바른 이성(orthos logos)(=실천적 지혜에 따른 이성)을 따르는(kata) 품성상태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 지혜를 동반하는(meta) 품성상태이기도 하기 때문

 

(Main Question 2 : “탁월성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가?”)

 

False Answer : “탁월성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 한 사람이 모든 탁월성에 대해 가장 잘 어울릴 수 없으므로, 그는 한 탁월성은 이미 가지고 있지만 다른 탁월성은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다.”(1144b35-36)

 

Main Answer 2 : “탁월성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 자연적 탁월성의 경우에는 탁월성들이 분리될 수 있지만, 단적으로 좋은 사람의 엄밀한 탁월성의 경우에는 분리될 수 없음. 실천적 지혜 하나만 갖추게 되면 모든 탁월성들 또한 가지게 되기 때문.

- Broadie & Rowe(2002, 383)에 따르면, 서로 분리된 탁월성들에 대응하는 서로 분리된 실천적 지혜는 모든 것을 고려하였을 때 가장 좋은 것을 언제나 결정할 수 없기에 제대로 된 실천적 지혜가 아님. 실천적 지혜가 확고하도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행위”(2, 1105a33)하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모든 탁월성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래서 실천적 지혜를 가졌다면 모든 탁월성들을 가진 것. 다만,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덜 엄밀한 의미로 탁월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음.

 

Main Question 3 : “실천적 지혜는 철학적 지혜를 지배하는가?”

 

Main Answer 3 : “실천적 지혜는 철학적 지혜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 의술(실천적 지혜)은 건강(철학적 지혜 or 영혼의 더 우월한 부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겨나도록 돌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명령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해 명령하는 것은 아님

- 정치술(실천적 지혜)은 폴리스 안에 있는 모든 것들(행위할 수 있는 것들 실천적 지혜의 대상)에 관련해서 명을 내리는 것이지만 신들(불변하는 것들 철학적 지혜의 대상)까지 다스리는 것은 아님

- Irwin(1999, 255)에 따르면, 철학적 지혜는 실천적 지혜에 의해 조직되고 계획된 인생에서 자리하게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학적 지혜가 실천적 지혜보다 가치가 덜한 것은 아님

 

이것들 외에도, 실천적 지혜가 [철학적] 지혜보다 못한 것이면서 [철학적] 지혜보다 더 주된 것이 된다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각각의 것과 관련해 다스리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니까.” (12, 1143b34-36)

 

그렇다고 실천적 지혜가 [철학적] 지혜를 지배하거나 영혼의 더 우월한 부분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1145a7-8)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김재홍, 이창우, 강상진 역 (서울: 2011)

Irwin, Terence,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translated with Introduction and Notes. Second Edition, Indianapolis/Cambridge 1999.

Broadie, S./Rowe, Ch.,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translatio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Oxford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