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절 Unterschiede zwischen visuellem und taktuellem Gebiet.
Differences between the visual and tactual realms
시각적 [영역] 그리고 촉각적 영역 사이의 차이들
*der Unterschied : 차이 (=unter- + scheiden : 갈라놓다, 구별하다) / das Gebiet : realm, (지배) 영역 (=ge- : 집합, 공동 + das Biet : 지역)
Wir finden nun einen auffallenden Unterschied zwischen der Sphäre des Visuellen und Taktuellen.
We find now a striking difference between the sphere of the visual and that of the tactual.
이제 우리는 시각적인 것들과 촉각적인 것들의 영역 사이의 하나의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한다.
*auffallend : striking (←auffallen : 위에 떨어지다, 눈에 띄다 (←auf- : 위로 + fallen : fall)) / die Sphäre : sphere
Im taktuellen Gebiet haben wir das taktuell sich konstituierende äußere Objekt und ein zweites Objekt Leib, ebenfalls taktuell sich konstituierend, etwa den tastenden Finger, und wir haben zudem Finger, den Finger tastend.
In the tactual realm we have the external Object, tactually constituted, and a second Object, the Body, likewise tactually constituted, e.g., the touching finger, and, in addition, there are fingers touching fingers.
촉각적 영역 내에서 우리는 가진다, 촉각적으로 구성된 외부적인 대상을, 그리고 하나의 제이의 대상인 육체를, 마찬가지로 촉각적으로 구성된 [육체를], 가령 만지는 손가락을,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손가락을 만지는 손가락을 가진다.
*äußer : 외부의 / ebenfalls : 마찬가지로 / zudem : 그뿐만 아니라
Hier liegt also jene Doppelauffassung vor : dieselbe Tastempfindung, aufgefaßt als Merkmal des “äußeren” Objekts und aufgefaßt als Empfindung des Leib-Objekts.
So here we have that double apprehension : the same touch-sensation is apprehended as a feature of the "external" Object and is apprehended as a sensation of the Body as Object.
여기에는[두 가지 촉각적으로 구성된 대상들(외부 대상과 육체)을 우리가 가지는 촉각적 영역] 그러므로 저 이중파악[경험]가 있다: 동일한 촉감각[에 대한]. “외부” 대상의 징표로서 파악된[경험된] 그리고 육체-대상의 감각으로서 파악된[경험된].
*hier (vor)liegt : 여기에 ~가 있다
Und in dem Fall, wo ein Leibesteil zugleich äußeres Objekt wird für den anderen, haben wir die Doppelempfindungen (jeder hat seine Empfindungen) und die Doppelauffassung als Merkmal des einen oder anderen Leibesteils als physischen Objekts.
And in the case in which a part of the Body becomes equally an external Object of an other part, we have the double sensation (each part has its own sensations) and the double apprehension as feature of the one or of the other Bodily part as a physical object.
그리고 다음 경우에, [즉] 하나의 육체 부분이 동시에 다른 것[육체 부분]에 대해 외적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이중감각들을 갖고 (각 부분이 자신의 감각을 갖고), 물리적 대상으로서 하나 혹은 다른 육체 부분의 징표로서 이중경험을 갖는다.
*der Fall : fall, case
Ähnliches haben wir nicht beim rein visuell sich konstitutierenden Objekt.
But in the case of an Object constituted purely visually we have nothing comparable.
유사한 어떤 것을 우리는 갖지 않는다,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구성된 대상에서.
*ähnlich : similar (←ähneln : resemble) / bei = bei + dem / rein : pure
Man sagt zwar mitunter “das Auge, über das Objekt hinblickend, tastet es gleichsam ab”.
To be sure, sometimes it is said that the eye is, as it were, in touch with the Object by casting its glance over it.
누군가 사실 때때로 [다음과 같이] 말하긴 한다 “눈은, 바라보는 대상의 위로, 그것[대상]을 흡사 더듬는다.”
*zwar : «aber, allein, doch로 시작되는 문장을 뒤에 동반하여, 양보를 표시함» 사실(과연) ~이긴 하지만 / mitunter : 때때로 / hinblicken : 바라보다 (=hin- : 특정 방향으로 + blicken : 보다) / gleichsam : 흡사 (=gleich- : 동등, 유사 + -sam : 유사)
*시각도 대상과 직접 접촉한다. 촉각이 그렇듯이. 그게 지향성의 본래적인 의미이다. 의식은 대상과 직접 만나는 것이지 중간에 표상 같은 것이 끼어있지 않다. (수업)
Aber wir merken sofort den Unterschied.
But we immediately sense the difference.
하지만 우리는 즉각 차이를 알아챈다.
*merken : notice / sofort : 즉각 (=so : 그렇게 + fort : 앞으로)
Das Auge erscheint nicht visuell, und es ist nicht so, daß an dem visuell erscheinenden Auge dieselben Farben als Empfindungen lokalisiert erscheinen (und zwar visuell lokalisiert seinen verschiedenen visuellen Erscheinungsteilen entsprechend), welche in der Auffassung des gesehenen Außendinges dem Gegenstand zugemessen werden, ihm zu-objektiviert werden als Merkmale.
An eye does not appear to one's own vision, and it is not the case that the colors which would appear visually on the eye as localized sensations (and indeed visually localized corresponding to the various parts of its visual appearance) would be the same as those attributed to the object in the apprehension of the seen external thing and Objectified in it as features.
눈은 시각적으로 현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다음과 같게]는 아니다[현출하지 않는다], [어떻게는 현출하지 않냐면] 시각적으로 현출하는 눈에 감각들로서의 동일한 색들이 위치화되어 현출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의[눈의] 다양한 시각적 현출 부분에 상응하여 시각적으로 위치화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색들은] 보여진 외부사물의 파악[경험] 내에서[에 있어] 대상에 할당될 것이다, [즉] 그것[대상]에게 향하여(zu) 객관화(objektiviert)될 것이다, 징표들로서.
*erscheinen : 나타나다, 모습을 드러내다, 현출하다 (=er- : 밖으로 + scheinen : shine, ~처럼 보이다) / verschieden : 서로 다른, 다양한 / entsprechen : correspond (=ent- : 반대 + sprechen : speak) / zumessen : 할당하다(달아서 나눠주다) (=zu : ~에 + messen : 재다) / der Gegenstand : 대상 (=gegen- : 대(對) + der Stand : 서있음)
*눈은 시각적으로 현출하지 않는다(Das Auge erscheint nicht visuell)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는 눈은 보는 눈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보는 눈은 보이는 눈과 구별해야 한다. 시각적으로 현출하는 눈에, 즉 보이는 눈에 동일한 색들(시각자료)이 감각들(empfindungen)로서 위치지어져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 시각적으로 현출하는 눈이 있되(보이는 눈이 있되), 거기에 동일한 색들이 장소화되어 현출하는 것은 아니다(사물을 보는 눈은 아니다). 혹은 2) 시각적으로 현출하는 눈이 없으니(보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거기에 동일한 색들이 현출하지 않는다(보는 눈의 시각자료도 현출하지 않는다). 한편 촉각의 경우, 촉각적으로 현출하는 육체부위에 촉각자료(예컨대 맨질맨질함)가 감각으로서 위치지어져 현출한다. (수업) 보이는 눈에 위치지어진 색감각들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보이는 눈임과 동시에 보는 눈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고, 보이는 눈이 보는 눈일 수 없음을 후설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해석을 지지) (사견)
*촉각도 마찬가지 아닌가? 시각의 경우에는, 똑같은 눈에 대해서, 보는 눈과 보이는 눈을 구별한다. 그러나 촉각의 경우에는, 예컨대 만지는 오른손과 만져지는 왼손에 대해서,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손을 구별한다. 따라서 시각의 경우와 촉각의 경우 사이의 정확한 대응을 토대로 한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나아가 만약 시각의 경우처럼, 똑같은 손에 대해서,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손을 구별한다면 충분히 만지는 손은 만져질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B) 내 왼손과 내 오른손은 내 몸통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다. 그래서 촉각의 경우도 시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교수님) 왼손과 오른손의 구분은 이미 시각적으로 몸의 형태를 관찰한 이후의 구분, 혹은 과학적으로 신체의 부위를 분류한 이후의 구분이다. 그런 구분을 도입하기 이전에 촉각적 사태 자체로 돌아갔을 때 우리 손이든 몸통이든 발이든 하나의 연결된 촉각장이다. (D)
*봄의 작용이 위치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봄의 내용이 위치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A) 여기서는 봄의 내용이 위치지어지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봄 작용도 위치지어지지 않는데 다만 이 맥락에서는 얘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는 작용과 내용을 구별하는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봄 작용의 위치지어짐은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인데, 정적 현상학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정적 현상학에서 감각은 비지향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발생적 현상학에서야 낮은 단계의 지향성과 대상적 내용이 있기 때문에 감각작용과 그것의 위치지어짐을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이념들2』가 과도기적 저작이라하더라도) 여기 텍스트 내에서 감각내용의 작용이란 말은 없으며 정적 현상학적 틀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의 존재, 즉 대상을 현출하게 하는 감각내용이 위치지어져서 등장하는지 여부인데 그것이 그렇게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교수님)
*정적 현상학 혹은 타당성의 구조를 논하는 현상학에서는 감각의 타당성을 내지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감각은 무조건 옳은 것인가? 지각은 옳고 그름 주장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각과 마찬가지로 감각도 타당성의 담지자이지만 지각과 달리 무조건 옳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지, 감각은 타당성의 담지자가 아니고 따라서 옳고 그름을 벗어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A) 벗어나있다고 봐야 한다. (교수님) 타당성을 담지하려면, 무엇이 있다/이다 등으로 서술될 수 있어야 하는데 감각자료는 그 단계가 아직 아니다. (D) ‘~이다’, ‘~다’라고 하면 타당성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근데 ‘~인 것 같다’, ‘~인 것처럼 보인다’라고 하면 타당성 주장을 하는 것인가? 나에게는 타당성 주장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A) ‘이 책상은 갈색이다’와 ‘이 책상은 갈색인 것처럼 보인다’는 다르다. 객관적 주장이,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없다. (교수님) 그렇다면 감각을 기술하는, 혹은 감각적 사태를 설명하려고 하는 ‘맨질맨질’ 같은 언어는 사태를 부정확하게 기술하고 설명할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A) 불가피하게 그렇게 밖에 기술할 수밖에 없다. 철학적 맥락에서 그러려니 이해를 해야겠다. (교수님)
*일반론적으로 시간관계를 도입하는 것이 발생적 현상학인가? 시간적 선후관계를 도입한다고 감각이 지향성을 획득하고 감각대상이 생기는 것인가? (A) 시간적 선후관계를 도입하였기 때문은 아니다. 발생적 현상학의 중요한 축이 시간적 선후관계이긴 하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식 전체 활동 전체를 강물에 비유해보자. 후설은 의식을 ‘체험류’라고 하는데 후설의 강물 비유를 그대로 받아들여보자. 한강, 낙동강처럼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런 의식흐름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언제부터 의식흐름이 시작되어서 여기까지 왔다. 그 의식흐름을 어느 점에서든 위에서 아래로 딱 자른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단면이 보인다. 그 단면이 층층이 층져서 있을 것이다. 정적 현상학에서는 그 중에 어느 층까지는 대상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모든 의식의 층에 나름대로 대상과의 넓은 의미에서의 의식적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맨 아래 것들도 대상과의 관련을 흐릿하게나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수님) 대상과의 관련성의 강도가 달라지는 것인가? (A) 그렇다. 타당성 주장 밑으로 가면, 즉 감각 밑으로 내려가면, 타당성 주장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을지 아니면 없을지 그걸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타당성 작용이 더 나타나지 않는 층이 있을 거 같다. (교수님) 그런데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지향성의 정의가 달라진다. 대상을 가짐에서 대상과 관련됨으로. 지향성의 정의가 애매하다! (A) 지향성의 정의 자체만 볼 때, 정적 현상학은 수정보완되는 것 같다. 지향성의 개념이 너무 타이트했는데 느슨해졌다. 정적 현상학에서는 앎이라는 요소, 지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의식 관계만을 염두에 두고 얘기할텐데 그런 것이 없을 경우에는 어떠한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 (교수님) 후설 의견이 아니라 내 자신의 의견인데 지적 요소가 없으면 체험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무의식이 개념을 활용하는 게 상상불가능한가? 개념의 아무런 매개 없이 의식활동을 진행시킬 수 있을까? 발생적 현상학의 가장 아래층으로 불리는 본능의 차원에서도 지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을 수 있다. 후설은 지적 요소가 없는 순수 감성적 체험이 있다고 하는 건가? (A) 규정적 표상이 있고 비규정적 표상이 있다. 이러한 넒은 의미에서의 표상이 객관화적, 지적 작용인 떠올림의 토대가 된다. 『논리연구』와 유고에서 후설도 비규정적(unbestimmte) 표상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표상이 전혀 없는 의식활동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깊이 잠들어 있으면서 방이 춥다고 이불을 끌어당길 때 의식이 있나 없나? 넓은 의미에서 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의식은 넓게는 생명활동이다. 그러나 그때 지향성은 지적 지향성이 아니고 표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지향성으로 보인다. 내가 배가 고플 때 어느 시점에 들어서면 음식 먹고 싶다는 표상이 생기지만, 그 이전에는, 허기라는 게 장시간 서서히 생기는 거니까, 그 이전에는 뭔가를 먹고 싶다, 그 정도로 표상이 될 때도 있고, 더 이전 단계에서는 대상과 관련이 없어도 허기가 있다. (교수님)
Und desgleichen haben wir keine ausgebreitete Augenhaftigkeit derart, daß fortschreitend Auge an Auge entlanggehen und das Phänomen der Doppelempfindung entstehen könnte
And similarly, we do not have a kind of extended occularity such that, by moving, one eye could rub past the other and produce the phenomenon of double sensation.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펼쳐진 눈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즉] 전진하면서[시각작용이 진행되면서] 눈이 눈 곁에서[곁을] 따라갈 수 있고 이중감각의 현상이 생길 수 있는 식으로.
*desgleichen : (=ebenso) likewise, also / die Augenhaftigkeit : occularity (=Augen + haftig : 구비, 경향, 작용 + keit) / derart, dass ~ : in such a way that ~, to such an extent that / fortschreiten : 전진하다 (fort : 앞으로 + schreiten : stride) / entlanggehen : 따라가다 (=entlang : ~을 따라 + gehen : 가다) / entstehen : 생기다 (=ent- : 생성 + stehen : 서다)
*촉각의 경우에 손이 손을 따라가는 건 아니다. 피부의 한 면이 다른 면을 따라가는 것이다. 왜 따라가냐고 하냐면 한 부분이 다음 부분을 따라가야 촉각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각의 경우 –여기서 굳이 한 눈, 다른 눈이라 해석 안 해도, 즉 똑같은 눈이라고 해도, 다시 말해 한 눈 안에서 얘기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눈(의 부분)이 눈(의 부분)을 따라가지 않는다. (교수님)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른눈으로 왼눈을 보는 경우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중감각을 이해하려면 왼눈이 오른눈을 보는 경우를 상정해야 하고, 그 경우에 시각에도 이중감각이 생기는 것 아닐까? (B) 두 손은 떨어져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손가락 구부려서 손 만지는 거랑, 한 손으로 다른 손을 만지는 거랑 같다. 몸으로 이어져있다. 그래서 예시를 한 손으로 들든, 두 손으로 들든 큰 차이가 없다. 한눈에 있어서든 두 눈에 있어서든 어쩌면 다른 사람 눈에 있어서든 후설은 시각의 이중감각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오른손과 왼손의 구별 혹은 오른눈과 왼눈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교수님) 손으로 생각하지 말고 육체부분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만지는 사태 자체만 보면 오른손이니 왼손이니 구별할 필요가 없다. 보는 사태 자체만 보면 오른눈이니 왼손이니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D)
; wir können auch nicht das gesehene Ding sehen als über das sehende Auge, es kontinuierlich “berührend”, hingehend, wie wir mit einem wirklich tastenden Organ, z.B. der Handfläche über den Gegenstand und mit dem Gegenstand über die Handfläche fahren können.
Neither can we see the seen thing as gliding over the seeing eye, continually in contact with it, as we can, in the case of a real organ of touch, e.g., the palm of the hand, glide over the object or have the object slip past the hand.
우리는 또한 보여진 사물을 볼 수 없다, 보는 눈 위에서, 그것이[보여진 사물이] 연속적으로 “접촉하는”, 스쳐지나가는 것으로서, 마치 우리가 실제로 만지는 기관으로, 예를 들어 손바닥으로 대상 위를 만지고 대상으로 손바닥 위를 문지를 수 있는 것처럼.
*z.B = zum Beispiel : 예를 들어 / fahren : (빠른 동작으로) 쓰다듬다, 문지르다
*hingehend는 어디에 연결시켜야할까? 앞에 beruhrend랑 동격으로 사용했을 수 있다. 즉, es kontinuierlich “beruhrend”, hingehend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uber das sehende Auge, ~ hingehend로 읽어볼 수도 있겠다. 즉, “보는 눈 위에서 스쳐지나가면서, 스쳐지나간다는 이야기는 사물이 손을 스쳐지나가듯이, 사물이 눈을 지속적으로 만져가면서”처럼 말이다. 영역에서는 gliding over the seeing eye라고 했다. (수업)
*hingehen의 의미가 잘 안 들어온다. “들판을 훑어본다.”라고 말할 때처럼 훑어본다고 번역하면 어떨까? (E) 여기서는 사태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예시로 든건 실제로 있는 사태, 실제로 있는 시각 현상, 대상에 대한 시각 작용이다. 그런데 그게 주제가 아니다. 촉각과의 유비가 성립하는지 안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촉각은 스쳐지나간다. 즉, 촉각작용을 하는 손을 계속 만지면서 스쳐지나간다. 이게 촉각의 경우에는 성립하지만, 시각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후설이 말하고 있다. (교수님)
Ich sehe mich selbst, meinen Leib, nicht, wie ich mich selbst taste.
I do not see myself, my Body, the way I touch myself.
나는 나 자신을, 나의 육체를 보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을 만지는 방식으로는.
*여기서 Leib가 나오면서 눈을 보는 사태만이 아니라 신체 전반을 보는 사태로 논의가 확장된 것이 아닌가? (B) 뒤에 이어지는 논의를 보고 결론을 내야겠지만, 여기서 내 눈뿐만 아니라 내 신체 전반에 대한 시각작용을 주제로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교수님) 근데 영역에서 계속 대문자 Body로 번역되고 있다. (H) 그 때 대문자 Body가 눈인지 피부인지 다른 무엇인지 이후로 잘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소문자 body라고 써도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교수님)
Das, was ich gesehenen Leib nenne, ist nicht gesehenes Sehendes, wie mein Leib als getasteter Leib getastetes Tastendes ist.
1) Natürlich wird man nicht sagen, ich sehe mein Auge im Spiegel; denn mein Auge, das sehende als sehendes, nehme ich nicht wahr ; ich sehe etwas, von dem ich indirekt, durch “Einfühlung” urteile, daß es identisch ist mit meinem (etwa durch Tasten sich konstituierenden) Ding Auge, ebenso wie ich das Auge eines Anderen sehe. (원주)
What I call the seen Body is not something seeing which is seen, the way my Body as touched Body is something touching which is touched.
1) Obviously, it cannot be said that I see my eye in the mirror, for my eye, that which sees qua seeing, I do not perceive. I see something, of which I judge indirectly, by way of "empathy," that it is identical with my eye as a thing (the one constituted by touch, for example) in the same way that I see the eye of an other.
그것, 내가 보여진 육체라 명명하는 [그것은] [다음과 같이] 보여진 보는 것이 아니다, 만져진 육체로서 나의 육체가 만져진 만지는 것인 방식으로.
1) 물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눈을 본다고. 왜냐하면, 내 눈을, 보는 것으로서 보는 [눈을] 나는 지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를 본다, 그에[무언가에] 관해 나는 간접적으로, “감정이입”을 통해 판단한다, 그것이 내 (가령 만짐을 통해서 구성된) 사물 눈과 동일하다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내가 타인의 눈을 보는 것과 같은.
*nennen : name(명명하다) / die Einfühlung : 감정이입 (=ein- : 안으로 + fühlen : feel)
*gesehenen Leib는 여기서 무엇을 뜻하는가? 눈인가, 눈으로 보여진 신체인가? (교수님) 이때까지의 시각-시각과 촉각-촉각을 대비하는 서술이 깨지지 않으려면 눈을 뜻해야 한다. 만일 눈으로 보여진 신체를 뜻하면, 갑자기 여기서 시각-촉각 관계를 다루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이상하다. 또한 각주에서 거울로 눈을 보는 사태를 들고 있다. (D, J) Leib를 굳이 눈으로 읽지 않아도 텍스트가 이상하게 읽히지 않는다. (B, C) Body 가운데서 특별히 눈을 염두에 두는 것 같다. 표현을 확장적으로 썼고, 사태 자체도 성립하지만, 텍스트의 맥락상 문장의 힘이 더 강해지려면 눈으로 읽는 게 맞다. (A)
*각주는 후설이 누군가 눈으로 눈 볼 수 있는데? 할까봐 넣은 것으로 보인다. 후설의 대답은 그 눈은 보여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업)
Eine visuelle Erscheinung eines Objektes, das sieht, d.h. in dem die Lichtempfindung angeschaut wird als in ihm seiend, fehlt.
A visual appearance of an object that sees, i.e., one in which the sensation of light could be intuited just as it is in it - that is denied us.
보는 어떤 대상[눈]의 어떤 시각적 현출은, 다시 말해, 그 안에서 빛감각이 직관되는, 그것[눈] 안에 있는 것으로서, [그런 시각적 현출은] 결여된다.
*das Licht : light / anschauen : intuit(직관하다)
Es fehlt also das Analogon zur Tastempfindung, die wirklich mit der tastenden Hand erfaßt wird.
Thus what we are denied is an analogon to the touch sensation, which is actually grasped along with the touching hand.
그러므로 촉감각의 유비물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만지는 손으로 실제적으로 포착되는.
*erfassen : 포착하다(=er- : 안에서 밖으로 + fassen : 붙잡다)
Die Rolle der Gesichtsempfindungen bei der korrelativen Konstitution von Leib und Außendingen ist also eine andere als die der Tastempfindungen.
The role of the visual sensations in the correlative constitution of the Body and external things is thus different from that of the sensations of touch.
육체와 외부사물들의 상관적인 구성에 있어 시감각의 역할은 그러므로 촉감각의 역할과 다른 어떤 것이다.
*상관적인 구성(korrelative Konstitution)이 무엇인가? 노에시스-노에마 관계가 아니라 이중적인 구성을 얘기하는 것 같다. 예컨대, 대상을 만지면, 대상이 파악되고, 만지는 동시에 만져지는 손이기 떄문에 손도 파악된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후설이 말한 것처럼 필연적(notwendig)이다. Body와 external things의 이중적인 구성이라는 의미에서 상관적인 관계를 얘기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촉각만이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다른 감각에 대해서 살펴봐야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하면서 당하는, 즉 능동과 수동의 계기가 섞여있는 감각방식은 촉감밖에 없다. (C) 예컨대, 손으로 책을 만지면, 책을 경험하는 동시에 손을 경험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책을 만지고 동시에 손이 만져진다. (D) 책이 경험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손이 경험되는 것은 분명한가? 차가운 책을 만졌을 때 손이 차게 느껴지는 건 반성을 통해 사실 경험되는 것 같다. (교수님) 두 가지 예를 구분할 수 있겠다. 1) 손이 손을 만지는 경우. 직접적으로 신체가 외부 사물인 경우. 2) 신체가 외부사물이 아닌 경우. 2)의 경우, 주제적이지 않고 비주제적으로 구성이 된다. (A)
외부 사물과 지각하는 의식이 있으면, 내적인 의식과 그것을 반성하는 의식이 있다. 그 경우에도 상관적인 구성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념들2』는 정적 현상학에서 발생적 현상학으로의 이행기 저작. 일단 정적 현상학이라고 해보자. 소위 지향적 체험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지향적 대상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의를 듣고, 소리를 듣고, 그 뜻을 파악한다. 강의를 이해하는 학생, 못하는 학생, 왔다갔다 하는 학생이 있을 것이다. 이해하는 학생은 이해한다는 것을 안다. 이해 못한다는 학생은 자기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확실치 않은 학생은 확실치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게 말하자면 내적 지각, 반성적 의식이다. 이 반성적 의식도 지향적 작용이다. 이러한 지향적 체험에서 신체가 역할을 하는가? 신체는 제삼의 영역일까? 그런데 여기에서는 신체와 외부대상만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 논의는 여기서 빼기로 하자. (교수님)
신체를 구성할 경우, 구성하는 몸과 구성된 신체(몸),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충분히 지금까지 이야기했으니까. 그러나 여타의 외부대상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 세계 전체까지 포함해서 –내적의식은 빼고-, 여기에서 몸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몸과 외부 세계 사이의 상관적 구성이 왜 나오는 것인가? 여기 텍스트에서 아닌 게 아니라, 신체와 외적인 사물을 이야기한다. 신체 자신이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어떤 도약이 있는 것! 이때까지 오른손 왼손을 주로 다뤘는데, 여기서는 몸과 외부사물의 상관적 구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 사물은 지금까지 논의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지난 시간 후반에 모래밭 위에서 토론한 거 같다. 텍스트 점검을 한 번 더 했었으면 내실있는 토론이 있었을텐데 아쉽다.
자, 저기 있는 책상을 구성한다고 해보자. 책상은 눈으로 봐서 구성한 것으로만 느껴진다. 모양이 직육면체이고... 등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사실 조금만 움직여도 책상은 전혀 달리 보인다. 물론 나는 책상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책상을 지각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책상 지각을 기술한다. 그런데 사실 매 순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대상이, 액체, 마치 물처럼 출렁거린다. 나는 액체 상태에서 저런 딱딱한 책상을 구성해놓고 계속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실제로 매순간 주어지는 것은 늘 다르다. 달라지는 이유는 나의 몸 때문이다. 비단 몸의 위치뿐만 아니라 몸의 상태에 따라 늘 달리 보인다. 똑같은 것도 자기 몸이 어떠냐에 따라 전혀 달리 경험된다. 컨디션이 좋으면 산뜻하게 경험된다. 몸이 피곤하면 지각이 잘 안 되고 흐릿하게 경험된다. 등산을 할 때도, 가령 관악산 등산을 한다 생각해보자. 내 몸이 산뜻하면 단번에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몸이 안 좋으면 몇 발짝 가다가 쉬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체적 조건들이 다 달라서 개인차도 있을 것이다. 신체적 조건이 다름으로써 산이 다른 의미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다. 산은 산뜻하게 오를 수 있는 것, 혹은 감히 오를 수 없는 것 등으로.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외부사물을 지각할 때 신체는 암묵적으로 구성될 것이다. 그리고 반성을 하면 그 내용이 분명해질 것이다. (교수님)
그런데 암묵적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가? (H) 비주제적이라는 의미이다. 예컨대 피아노를 치면, 주제적으로는 건반이, 비주제적으로는 피아노 치는 손가락이 경험된다. (A). 신체가 어떤 역할을 할지, 상관적인 구성이 뭔지 여러분도 생각해보라. 여기서 첨가하고 싶은 얘기는, 신체 구성은 대개 암묵적으로 이뤄지지만, 주제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교수님) 헬스할 때, 예를 들어 등운동할 때, 평소에는 쓸 일이 없는 광배근을 의식하게 된다. (D) 그림을 감상하다가 멀리서 한 번 보고 싶어서 움직일 때 나의 몸을 의식하게 된다. (A) 등산하기 힘든 사람은 ‘몸이 힘들구나’ 잘 반성할 것이다. 그러나 등산을 잘하는 사람은 따로 몸에 대해 반성을 잘 안 할 것이다. 보통 일상적인 삶의 리듬이 깨질 때, 장애가 있을 때, 피곤할 때, 몸이 잘 작동 안 할 때, 일을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할 때, 그럴 때 몸이 주제화가 된다. (교수님)
37절 시작하기 전에 탁자 지각과 신체 지각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었다. 신체와 외부사물이 상관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주제화하고 있지 않든 하든, 필연적인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인다. (C) 논의와 관련해서 좋은 대목을 지적해주었다. 필연적 연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교수님) 주제적이든 비주제적이든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책상도 촉각적으로 지각할 때, 손을 의식적으로 분명한 양상에서 의식하고 있지 않더라도 언제나 손의 지각이 무의식적으로 같이 이뤄지고 있다. (C) 저쪽이 없으면 이쪽이 없고, 이쪽이 없으면 저쪽이 없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교수님)
*구성이 지각인가? (B) 다양한 구성이 있고, 그 중 하나가 외부 지각이다. 반성도 구성이고,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면 다 구성이다. (C, 교수님) 그런데 1) 초월론적 주관의 모든 성취를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2) 모든 구성은 지향적 구성인가? 비지향적 구성은 형용모순인가? (A)
2) 우선, 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저쪽에 있는 무엇을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그 무엇을 넒은 의미에서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경험하는 것이 구성이다. 그런데 의미라고 하는 것의 출처가 어디인가? 지향성이다. 지향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의식 활동이 작동하는 한에서 구성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후설에게서 지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뀐다. 『논리연구』에서는 소위 객관화적 작용만이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혹은 객관화적 지향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작용만이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무엇이 있다는 주장을 담는 지향성, 즉 인식적 작용 내지는 아는 작용이, 가장 낮은 단계의 아는 작용이 맨 밑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모든 작용이 구성 기능이 있다. 그러나 발생적 현상학으로 넘어가면서 소위 감각내용-파악작용의 도식이 깨진다. 깨지면서 우리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의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 생명작용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 leben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 그것들이 다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삶의 활동은 그 무엇을 향해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세계와의 교섭이 이루어져야 하니까. 넓은 의미의 삶이라고 하는 것, 그 속에 지향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안에 무의식도 포함된다. 밤에 추워서 이불을 끌어당길 때, 이건 살려고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외부세계를 너무 추운 방 너무 더운 방으로 대하면서 말이다. 이건 단순한 반사작용만은 아니다. 반사작용이라는 것 속에 생명활동, 지향성이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지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다양하다. 그리고 끊임없다. 밤에 잠 잘 때도 작동한다. 여기로 오면 『논리연구』에서의 도식은 완전히 해체된다. 그러면 후설의 현상학이 여러 철학 사조들, 예컨대 생철학, 무의식에 관한 이론 등과 다 통하게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누군가가 이렇게 넓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 지향성 개념을 좁히면 인식 현상을 설명하는데 도움된다. 지향성 개념을 넓히면 인식 현상의 뿌리까지 해명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광활한 의식 영역이 다 드러나게 된다.
이까지 지향성과 구성이 같이 간다. 지향성이 있을 때 구성이 있고, 구성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구성은 의미로서 대상에 대한 구성이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러면 비지향적 구성이란 얘기는 정적 현상학 콘텍스트에서만 타당한 얘기이다. 비지향적 구성이란 말하자면 궁여지책적인 개념이다. 정적 현상학 안에서 정립된 구성이 아닌 구성이, 그 밑에 풍부한 구성이 보이는데 그걸 정의하기 위해 나온 궁여지책인 것이다. 정적 현상학으로만은 안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후에 셰마(Schema)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궁여지책적인 개념처럼 보인다. 나중에 수동적 종합이라는 개념으로 탈바꿈한다고 생각한다. 혹시 이 개념을 다룬 논문을 본 적 있는가? 못 봤는데 관심 있는 사람은 「후설 현상학에서 구성과 셰마」라는 논문을 써보라. 이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보자. 여하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지향성-구성-의미는 같이 간다.
1) 구성을 초월론적 주관의 성취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구성은 초월론적 태도에서만 드러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자연적 태도에서 구성, 내지는 자연적 태도에서의 구성적 현상학은 어떠한가? 자연적 태도에서의 구성적 현상학이 가능한가? 그 얘기를 해보겠다. 초월론적 현상학과 초월론적이지 않은 현상학이 있다. 앞서 언급한 『논리연구』는 초월론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현상학적 심리학』이라는 책에서도 그렇다. 모두 자연적 태도에서의 현상학이다. 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연구』에서도 얘기할 수도 있고, 초월론적 현상학에서도 얘기할 수 있다. 『논리연구』에서는 구성을 deutung, 즉 해석이라고 말한다. (교수님)
구성 개념을 좁혀야 하지 않냐? 의미의 출처를 주관이 아니라,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 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초월론적 태도를 경유해서 자연적 태도로 귀환하는 경우가 아니고선 소박한 태도에 있는 사람이 구성을 한다? 모순처럼 느껴진다. (A) 『이념들1』 후기에 후설 자신이 자연적 태도의 구성적 현상학이라는 말을 쓴다. 이 개념이 현상학적 사회학을 전개한 알프레드 슈츠에게 중요하다. 후설 현상학과 베르그송 철학을 토대로 베버의 사회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현상학적 사회학을 개척하고자 하였다. 주저는 『사회세계의 유의미한 구조』. 사회학자라 후설을 받아들이면서 초월론적 현상학을 조금 이상하게, 칸트식으로 이해했다. 칸트의 경우, 초월철학에서 초월론적 의식은 하나다. 거긴 상호주관 문제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런데 슈츠는 후설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서, 즉 칸트의 영향을 받아 초월론적 주관이 단수라고 이해하면서 초월론적 현상학이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현상학적 사회학을 하려면 다수 주관이 전제되어야 되는데, 전제하지 않고 나아가려라고 하니,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길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슈츠는 후설의 초월론적 주관을 버리고 자연적 태도에서의 구성으로 사회적 세계의 현상학을 발전시켰다. 슈츠 자신도 자연적 태도의 구성적 현상학을 사회학 쪽으로 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 모습은 초월론적 주관이다. 모든 사람은 초월론적 주관으로서 늘 구성을 하고 살면서 의미로서의 세계까지 구성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세계지평을 망각하고, 자기자신이 초월론적 주체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자신을 경험적 자아, 세속적 자아로 파악하면서 산다. 그 세속적 자아는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세계지평을 망각하고, 거세시켜버리고, 세계를 개별적 대상들의 집합체로만 사용한다. 그러니깐 세속적 자아에게 세계는 큰 개별적 대상일 뿐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세계에는 거세된 대상들만 남게 된다. 세계는 있는 것들의 총체로 이해되는 것이다. 지평이란 것을 모른다. 결국은 자연적 태도에서 구성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에 대해서 자연적 태도에서 연구를 할 수 있지만, 그런 연구는 한계가 있다. 개별적 대상의 구성밖에는 해명이 안 되는 것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의미 해명을 안하는가? 하면서 산다. 충분히 실제로 그러고 살고 있고, 그걸 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연적 태도에서의 구성적 현상학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빙산이 있으면 빙산의 일각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초월론적 현상학은 구성을 뿌리까지 해명하고자 한다. 자연적 태도에서의 구성적 현상학은 그냥 자연적 태도에서의 연구와 다르다. 이쪽은 현상학적 심리학적 태도이고, 저쪽은, 실증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 객관주의적 태도이다. 후설 식으로 말하면 철학과 비철학 사이가 나뉜다. 그게 우리 주관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할 때, 비철학이다. (교수님)
*어째서 발생적 관점에서만 본능이나 시간화나 감각의 차원이 지향적인 것으로 드러나는가? (A) 지향성 개념을 바꾸면 다 드러난다. 원래의 정적 현상학에서 수정된 지향성 개념을 적용하면, 즉 수정된 정적 현상학에서는 그것들이 지향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원래의 정적 현상학에서는 비지향적인 체험이 있고, 거기에 지향적 체험이 가해져서 지향적 대상이 나온다. 지향적 의식이 지향적 대상을 향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건 밑에 비지향적 체험이 있어서 그렇다, 비지향적 체험을 해석해서 지향적 대상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내용도 사실 의식과 같이 가는 것이다. 여기서도 노에시스-노에마가 있다. 그런데 그 밑에도 한 세트가 또 있고, 더 밑에 더 있고, 계속 있는 것이다. 노에시스-노에마가 계속 내려가면 끝이 어딜까? 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데 그것이 본능적 지향성이다. 여기서부터 노에시스-노에마가 계속 올라가면, 과학적 대상-과학적 의식, 가장 위에는 철학적 대상-철학적 의식이 있다. 여기서 하나 이야기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의식을 발생적 현상학에서 남김없이 분석했다 치자. Genesis(genesis)는 남김없이 해명됐다 치자. 그러고 나서 남는 질문이 하나 있다. 남는 문제는 타당성 문제, Geltung(validity) 문제다. 발생 문제를 아무리 해명해도 타당성 문제는 요만큼도 해명된 것이 아니다.
발생적 현상학에서 파생적으로 드러났던 것이 정적 현상학에서는 근원적일 수도 있다. 반성적 자기의식은 모든 타당성의 정초 토대이다. 우리는 모두 맞는지 틀린지 점검하기 위해서는 반성적 의식에 호소한다. “잠깐만 생각 좀 해보자!”라고 말한다. 모두 자기의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식은 발생적 관점에서는 제일 위에 온다. 어린아이가 반성적 의식을 가지는가? 태아는? 없다. 근데 반성적 의식이 정적 현상학에서는 가장 밑바닥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타당성 정초관계를 해명하면 맨 밑에 오는 것이 반성적 자기의식이고, 맨 위에 파생적인 것에는 본능, 타인의 의식 같은 게 올 것이다.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그것들이 근원이지만 말이다.
『논리연구』나 『이념들1』 같은 데서 정적 현상학이라고 하는데, 즉 타당성 정초 관계를 탐구한다고 하는데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발생적 정초가 문제인데, 정적 현상학에서는 타당성 정초가 문제다-, 사실은 불완전한 정적 현상학이다. 발생적 분석을 정말 열심히하고, 그 여러 의식들을 다 보고 타당성 정초를 해야 한다.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의식들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해명이기 때문에 발생적 현상학을 먼저 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타당성을 제대로 정초할 수 있다.
*본능은 항상 타당하지 않은가? (A) 본능은 validity claim이 없다. 그냥 대상으로 향하기만 한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건 없다. 옳고 그름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다. (교수님) 그렇다면 정적 현상학에서는 본능이 주제 바깥에 있나? (A) 발생적 현상학에 드러나는 모든 의식이 정적 현상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 당연히 정적 현상학에서 본능 얘기가 나올 수 있고, validity claim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본능의 정체가 뭔지 탐구할 수 있다. 본능은 validity claim이 없다. 하지만 이조차 validity 정초관계와 관련해서 이루어진 진술이다. 본능은 validity claim을 갖지 않는다는 진술은 부정적 진술이긴 하지만 정적 현상학에서 해줘야 하는 중요한 진술이다. (교수님)
*발생적 정초관계는 시간적 선후관계인가? 예컨대 호기심이라는 본능에 입각해 특정한 대상을 탐구한다고 하자. 근데 호기심과 탐구가 시간적 선후관계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아주 조금이라도 빨리 발생하는 것 같지 않다. (A) 발생은 첫째 역사적 발생이 있다. 예컨대 하나의 과학이론이 정립되는 과정이 과학사다. 역사를 거쳐서 나온 결과물이 나오게 된 과정 전체를 점검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적 선후관계를 얘기할 수 있다. 아까 예시를 토대로 이야기해보자. 모두 앎에 대한 욕구가 있어서 강의에 참석한 것 아닌가? 들어오기 전에 그런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고, 이런 저런 토론을 통해 나름의 결론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 현재 시점에서는? 그런 호기심 본능이 발동해서 지금 질문한 순간이 생긴 것 아닌가? 일단 그걸 알게 된 시점, 지금 이 시점에서 봐도, 호기심 본능은 과거에 작동했던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 작동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만 보면 지금 같이 작동하지 않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도 끊임없이 호기심 본능이 작동해서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이고, 본능이 작동하지 않으면, 호기심 본능이 꺼지는 순간이 만약 있다면, 그때는 질문도 토론도 안 할 것이다. 이 밑에 것이 꺼지면 이 위에 것이 꺼지게 된다.
그러니까 발생적 현상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보아야 한다. 현재 시점과 역사로. 현재시점만 봐도 밑에서 호기심 본능이 작동해서 묻고 토론하다 보니 ‘그림을 이해했다’고 말하게 된다. ‘그림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본능 작동한다. 이 위에서 Abbau(헐어내기, 걷어내기 dismantling)를 하면, 맨 위에 것이 가장 나중에 나온 것이고 맨 밑으로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노에시스-노에마를 층층이를 걷어내면, 현재 시점에서 구성의 정체가 다 드러난다. 내 세계 구성을 철저히 분석하려면, 이런 작업을 해주고, 이런 작업 전체를 세팅으로 해서 또 과거로 과거로 헐어내기해줘야 한다. 그래서 발생적 현상학은 늘 현재 시점에서 걷어내면서 해명하고, 그 다음에 재구축해보고, 그 다음에 전체가 하루 아침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인사적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걷어내면 상호주관성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Abbau도 환원이다. 환원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현재 시점에서 역사적으로 디스맨틀링하는 것도 환원이다. 초월론적 태도에서 하면 초월론적 환원이다. 그러면 환원이라는 방법도, 이차문헌에서 얘기된 것 이상으로 복잡한 것이다. (교수님)
Abbauen은 『내적시간의식의 현상학 강의』에서의 Abbauen과 유사하게 이해하면 될까? 거기서도 Abbauen을 한다. (E) 지금 얘기한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파악작용-감각내용 도식에 입각해서 Abbauen을 해서, 그래서 한계가 있다. (교수님)
*육화된 의식으로 의식을 재정의하면 반성적 의식과 지각적 의식의 외연이 일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A) 육화된 의식이라는 것은 후설에게서 자명한 이야기이다. 물론 후설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은 연구자들도 있다.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관계를 연구한 연구자들의 반은 그렇게 기술한다. 한 반절 정도는 초월론적 의식이 육화된 의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강의에서 읽은 텍스트만 읽어봐도 초월론적 의식이 육화된 의식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연구자들이 후설 텍스트를 편향적으로 읽거나 아주 부분적으로 읽고 그게 후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원텍스트 충분히 읽고 이차문헌을 선별적으로 읽어야 한다. 원텍스트를 충분히 읽지 않고 이차문헌 읽으면 이상하게 빠질 수 있다. 육화된 의식이라는 것은 자명한 전제이다.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와 육체-외부사물 상관관계는 동일한 것인가? (교수님) 단서를 붙이자면, 외부사물 뿐만 아니라 내재적 대상을 포함하면 그럴 것이다. (A) 외연이 같지 않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신체와 외적인 사물은 구성된 신체이고 구성된 외적 사물이기 때문에, 신체와 외적 사물을 각각 파악하는데 있어서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게가 있지만, 신체와 외적사물과의 관계는 노에시스-노에마 관계는 아니지만 필연적인 관계다. 각각에는 노에시스-노에마 관계가 포함되어 있지만, 각각을 봤을 떄는 아니고 필연적 연결을 가지고 있는 관계라고 이해함. 신체와 외적 사물은 구성된 것-구성된 것의 관계이다. (C) 구성된 손과 구성된 책상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책상을 구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외적 사물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구성할 손과 구성될 책상 아닌가? 거기서 손은 이미 구성된 것 아닌가? (B) 시간 안에서 신체의 구성은 이미 습관화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순간을 봤을 때 또 신체의 구성의 메카니즘이 있다. (D) 각자의 구성에 서로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A) 신체가 외부 사물을 구성하고, 외부사물이 신체를 알려준다. (H)
쉽게 구성을 경험이라고 하자. 신체에 대한 경험과 외부사물에 대한 경험이라고 하자. 신체 경험이 있고 외부사물 경험이 있고, 이 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문제는 경험된 신체와 경험된 외부사물 사이에 경험된 신체가 경험된 외부사물을 향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하나의 주관이고, 하나의 객관이기 때문이다. 그럼 넓은 의미에서 노에시스-노에마 관계가 존재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성적 의식까지도 육화되었다고 하면 양쪽이 일치한다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 논지가 일관적이려면 그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반성적 의식도 모든 지향적 의식도 육화된 의식이다. 그러면 노에시스-노에마가 신체-대상과 일치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나가는 길이 그 길이다. 이 텍스트를 쭉 읽어가면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후설도 그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육화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무의식이 있고, 반성은 육체와 떨어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지향적 체험은 육체와 밀접하다. 근데 지향적 체험은 육체와 떨어져있다. 그러나 육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이 대목, 신체와 외적 사물의 상관적인 구성의 윤곽이 드러났다. (교수님)
*그렇다면 상관적인 구성에 있어서 시감각의 역할은 촉감각의 역할과 다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교수님) 촉감각의 경우, 외부사물을 구성하는 동시에 신체를 구성하지만, 시감각은 동시에 안 되고 간접적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촉감각의 경우 외부사물을 경험하는 동시에 촉감각하는 신체가 경험되지만, 시감각의 경우 외부사물을 경험하는 동시에 시감각하는 신체가 경험되지 않는다. 다만, 간접적으로 경험된다. 내 눈을 만짐으로써 아니면 예전에 그렇게 만졌던 경험을 통해서만 경험되는 것이다. (A) 시감각의 역할이 다른 게 아니라 없는 거 아닌가? 동시적 구성 정도면 이해가 되는데, 상호구성은 안 된다. 상호구성은 촉각만 된다. (B) 시감각 기관으로서의 눈이 신체에 귀속되는 것은 위치감각, 본래적인 위치감각을 통해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간접적이고 비본래적으로는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A)
Wir können hier nur sagen : ohne offenes Auge keine Gesichtserscheinung u.dgl.
All that we can say here is that if no eye is open there are no visual appearances, etc.
우리는 여기서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열린[뜬] 눈이 없으면 시각현출 등등도 없다라고.
*u. dgl. = und dergleichen : 등등
Wenn schließlich doch das Auge als Organ und mit ihm die visuellen Empfindungen dem Leib zugeordnet werden, so geschieht das auf indirektem Wege vermittels der eigentlich lokalisierten Empfindungen.
If, ultimately, the eye as organ and, along with it, the visual sensations are in fact attributed to the Body, then that happens indirectly by means of the properly localized sensations.
만약 최종적으로 기관으로서 눈과 그와[눈과] 더불어 시각적인 감각들이 육체에 부속된다면, 그것은[그러한 부속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본래적으로 위치지어진 감각들을 매개로.
*schließlich : eventually, in the end, after all (←schließen : 닫다) / (jn.) et.3 zuordnen : (누구를) 무엇에 부가(부속, 편입)하다 / vermittels = mittels : by means of
*properly localized sensations = 촉감각. 시감각과 촉감각이 신체 구성에 있어 역할이 아주 다르다. 촉각은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그 손이 나의 몸이라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눈은 그것이 신체의 눈으로 알려지려면 촉각을 매개로만 알려질 수 있다. (수업)
*눈은 어떻게 촉감각을 통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auf indirektem Wege) 부속되는가? (수업) 손으로 눈을 만지는 케이스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눈이 그 자체로 촉감각적 장으로서 시감각적 장으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D) 아니다. 손으로 만져져지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이라서 그렇다. (F) 눈도 안구운동장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움직이고, 근육감각이 있는 것 같다. 예컨대 ‘눈이 뻑뻑하다’라고도 말한다. (E) 눈 주변에 근육 혹은 살이 눈을 만진다고 이해하면, 손으로 만진다고 이해하는 것과 같이 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D)
*시감각은 위치지어지는 것이냐 위치지어지지 않는 것이냐? 위치지어진다고 해도 이상하고, 위치지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하다. (B) 시감각만의 위치지어짐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사후적으로 위치지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F, A) 감각이라고 해서 위치와 장소를 갖는 것은 아니다. 갖는 감각과 갖지 않는 감각이 각각 촉감각 시감각. 그래서 감각이라는 것과 위치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모순이 아니다. (C) 시감각은 감각인 한에 있어서 외부대상을 알려준다. 그 점에서 촉감각과 다를 바 없다. 그 두 점에 있어서는 감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근데 그것의 위치지어지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이다. 시감각은 간접적으로만 이루어진다. 그게 전체적인 요지이다. (교수님) 의아한 것이 앞에서 위치감각은 사물이 감각기관의 어느 부위에서 감각되는지에 대한 감각이었는데, 여기서 위치감각은 감각기관이 신체의 어느 부위에 붙어있는지에 대한 감각인 것 같다. 즉, 위치감각의 의미가 바뀌어버린 것 같다. 전자의 의미에서 시감각은 위치지어질 수 없는 것 아닌가? (B)
(수업 : 이남인, <서양현대철학연습> (2022-2))
(영역 : Richard Rojcewicz and Andre Schuwer(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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