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dem Vorzug der Lokalisation der Tastempfindungen hängen Unterschiede in der Komplexion visuell-taktueller Auffassungen zusammen.
Connected to the privilege of the localization of the touch sensations are differences in the complexion of the visual-tactual apprehensions.
촉감각들의 위치지어짐의 특권과 함께, 시각적-촉각적 파악들의 복합체 안에 차이들이 결합되어 있다.
*der Vorzug : 우선권, 특권 / zusammenhängen : hang together, joined together, be connected
*촉감각의 특권(Vorzug)은 가장 본래적인 의미에서 일차적으로 위치화, 장소화되는 것을 말한다. (수업)
*시각적-촉각적 파악들의 복합체(Komplexion visuell-taktueller Auffassungen)는 무엇인가? 무언갈 보면서 동시에 만지는 경험을 말하는 것 같다. (수업)
아래의 내용을 토대로 이 문장의 내용을 다시 따져보자. 촉감각의 위치화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 무엇 안에서의 차이냐 하면, 시각적-촉각적 파악들의 복합체 안에서의 차이가 생긴다. 그렇다면 시각적-촉각적 파악들의 복합체는 무언인가. 시각적 파악과 촉각적 파악이 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같이 일어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복합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촉각:시각 구성비가 100:0인 경우가 있고 0:100인 경우가 있다. 시각은 없고 촉각만 있을 수 있고, 촉각은 없고 시각만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 들고 있는 예시(순전히 눈만 가지고 있는 주체)는 시각이 100이고 촉각이 0인 경우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촉각이 100이고 시각이 0인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렁이가 그렇다. 지렁이는 자기 신체에 대한 감각은 가질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니까. 이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가장 순수하게 현상하는 신체로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양극단 사이의 여러 구성비에는 일상적 인간들이 해당될 것이다. 아까 얘기했던 마비환자는 시각 99.99, 촉각 00.01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시각이 거의 마비된 경우는 구성비가 반대일 것이다.
결국 시각적-촉각적 파악들의 복합체는 0:100 ~ 100:0 사이의 무수히 많은 시각적 파악과 촉각적 파악의 조합가능성으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주 명료하다. 복합체를 조합이라고 읽어도 무방해보인다. 이 첫 문장에서는 조합들에 있어서의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미리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교수님)
Jedes Ding, das wir sehen, ist ein tastbares, und als solches weist es auf eine unmittelbare Beziehung zum Leib hin, aber nicht vermöge seiner Sichtbarkeit.
Each thing that we see is touchable and, as such, points to an immediate relation to the Body, though it does not do so in virtue of its visibility.
우리가 보는 각 사물은 어떤 만질 수 있는[촉각적인 것]이고, 그런 것으로서 그것은[각 사물은] 육체를 향한 직접적인 관계를 지시한다. 하지만 그것의[육체의] 가시성[보아질 수 있음] 때문은 아니다.
*tastbar : 만질 수 있는 (=tasten + -bar : able) / hinweisen : 지시하다 / unmittelbar : 직접적인, 무매개적인 (=un- + das Mittel : 중간(물) + -bar) / vermögen : be capable of, in the virtue of / die Sichtbarkeit : visibility
*앞 문장에서의 촉감각의 특권은 위치화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신체를 향한 직접적인 관계를 지시할 수 있음을 말한다. (교수님) 그런데 지향성 개념을 따져보면 시각도 직접적으로 신체를 지시하는 것 아닌가? (E) 여기서는 신체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보는 것은 촉각 때문에 신체를 지시할 수 있다. 시각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교수님) 후설이 신체와 사물 사이의 관계를 담지하는 것과 그것이 성립함을 확인 내지는 반성하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것 같다. 반성하기 위해 촉각이 요구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연결시키는 것인가? (A) 신체와의 관계는 촉각뿐만 아니라 시각에도 있는데, 촉각을 통해 반성 가능한 거 아닌가? 그리고 ‘hinweis’가 반성의 차원에서 한 얘기였는가? 물론 시각도 보는 사물과의 육체적인 관계, 눈이라고 하는 신체와의 관계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출하는 신체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경험하게 것은 촉각을 통해서다. (교수님)
Ein bloß augenhaftes Subjekt könnte gar keinen erscheinenden Leib haben; es hätte im Spiel kinaesthetischer Motivationen (die es nicht leiblich auffassen könnte) seine Dingerscheinungen, es sähe reale Dinge.
A subject whose only sense was the sense of vision could not at all have an appearing Body; in the play of kinesthetic motivations (which he could not apprehend Bodily) this subject would have appearances of things, he would see real things.
어떤 순전히 눈적인[눈만 가지고 있는] 주체는 현출하는 육체를 전혀 가질 수 없다; 그것은[순전히 눈적인 주체는] (그것이[순전히 눈적인 주체가] 육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키네스테제적인 동기들의 작동 속에서 자신의 사물현출들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순전히 눈적인 주체는] 실제적인 사물을 볼 것이다.
*augenhaft : 시각적인 (=augen : 눈의 + haft : 가능, 작용)
*순전히 눈적인 주체(ein bloß augenhaftes Subjekt)가 무엇인가? 일단 눈밖에 없는 주체로 이해할 수 있겠다. (교수님) 꼭 눈만 있어야 하는가? 인간이라도 시각밖에 없는 인간을 상상해보면 되지 않는가? (B)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전신이 마비되어 감각이 없고 눈만 꿈뻑일 수 있는 사람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D) 그러한 사람은 그 전에 촉각 경험을 겪은 바가 있어서 적합한 예시인지 모르겠다. (교수님) 그런데 이런 상황이 후설의 논지에 도움이 되는가? 시각만으로는 나의 육체를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시각이 인간의 것일 경우 이미 육화된 시각일 것이기 때문에 육화를 확인하기 위해 촉각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사고 실험이 부족한 것 같다. (A)
*오직 눈만 있는 주체가 키네스테제적인 동기들(kinaesthetischer Motivationen)의 작동 속에서 사물 현출들(Dingerscheinungen)을 가질 수 있는가? 키네스테제적 작동을 위해서는 눈만으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움직일 수 어야 하는 거 아닌가? (E) 눈만 있는 주체가 돌아다닐 수 있다고 쳐보자. (교수님) 키네스테제 감각은 비감관감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C) 눈만 있다고 해서 비감관감각을 가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눈이 돌아가면서 현출이 계속 바뀔 수 있다. 그 바뀜의 근거를 정상적인 인간의 경우에 키네스테제 감각에 둔다. 단지 눈만 있는 주체도 그렇게 둘 수 있다. 현출이 바뀌는 근거는 키네스테 감각의 변화 뿐이다. (교수님)
*현출하는 신체(erscheinenden Leib)는 무엇인가? 순전히 눈적인 주체는 현출하는 신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할 때 말이다. (교수님) 구성된 신체이다. (C) 무엇으로 구성이 되었는가. 물리적 사물로도 구성될 수 있다. (교수님) ‘내’ 신체로 구성이 안 된다는 말 같다. (D) 그렇다. 눈만 가지고 있는 주체는 자기 자신을 현출하는 신체로서 가질 수 없다 내지는 경험할 수 없다. (교수님) 여기서 과연 신체가 경험이 안 되는 건지,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서 현출하는 신체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은 경험 인식을 얘기한다. 그러나 경험이 안 되더라도 신체가 있을 수 있다. (A) 후설 현상학에서는 경험이 안 되면 있다고 얘기할 수 없는 것 아닌가? (D) 경험될 수 없는 건 현상학적으로 무의미하다? 반드시 그건 아니다. (A) 현상학이 경험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모른다, 알 수 없다, 판단을 중지한다. 경험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열어 놓는다. (교수님)
다른 이야기지만 세계가 경험이 되는가? 경험의 가능조건으로 요청되는 확실성이 있는 것은 알겠다. 근데 경험이 되는가? (A) 세계는 주제적으로 경험되지는 않는다. 만일 세계가 주제적으로 경험되면, 그것은 지평으로서의 세계의 정의에 어긋난다. 그렇다고 경험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암묵적으로 경험된다. 예컨대, 책가방을 경험한다고 해보자. 우리가 단순히 검은 물체가 아니라 책가방을 경험한다고 하면 우리는 책이 무엇인지 알고 가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가방을 안다는 것은 무언가를 담는다, 어떻게 둘러맨다, 들고다닌다 등을 안다는 것이다. 책은 또 글자니 공부니 이것저것 속에서 성립한다. 그러면 우리는 책가방을 주제적으로 경험하면서 이 모든 것을 암묵적으로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경험될 수 없다면 단순한 책가방이란 대상이 어떻게 경험될 수 있겠는가? (D) 요청이 되는 게 아니라 경험된다. 가능조건이지만 그 지평이야 늘 경험되는 것 아닌가. 해외에 나가면 우리는 이질감과 불편감을 느낀다. 문화권이라는 넓은 지평이 바뀌어서 그런 것 아닐까? (교수님) 그렇다면 후설은 왜 세계가 ‘전제’라고 하는가? (A) 먼저 경험된다는 것 아닐까. (교수님) 그때 먼저는 논리적 먼저인가? (A) 시간적 먼저일 수도 있다.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개별적인 대상을 경험하니까.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타당성 정초관계인가도 따져볼 수 있다. 후설의 『위기』에서 세계에 대한 직관 경험은 개별 대상에 선행한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시간적 선행이고 -그건 하이데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이차적으로는 타당성 정초관계이다. 『위기』에서 마이클슨 몰리 실험 이야기가 나온다. 물리학자들이 실험할 때 물리학적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생활세계적 직관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망원경, 현미경을 보기 때문이다. 보는 활동은 생활세계적 활동이다. 그래서 정초관계가 있다. 세계는 이렇게 현상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 (교수님) 가능조건으로서 경험함 혹은 지평으로서 경험함과 요청함은 어떻게 차이나는가? (A) 칸트의 경우 요청되는 건 무엇인가. (교수님) 신, 영혼의 불멸성, 물 자체. (A) 그런데 그것들은 경험이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을 하는 게 좋겠다, 그 정도가 요청이다. 경험은 안 되되, 있다고 가정하는 게 편하겠다. (교수님) 논리적 가능조건이라 했을 때, 논리적 가능조건으로 경험함과 요청함의 차이를 모르겠다. 논리적 가능조건이 경험이 되는가? (A) 경험이 되니까 과학자들이 현미경, 망원경 보고, 기록하고, 토론하는 것 아닐까. (교수님)
다시 현출하는 신체는 무엇인가? 현출하는 신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신체다. 육화되어 있다고 얘기를 하는 신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속성들 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신체는 학문하기 이전에 일상적으로 우리가 신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경험들이다. 그렇게 현상하는 신체를 순전히 눈적인 주체는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교수님)
*순전히 눈적인 주체는 원칙적으로 현출하는 신체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눈이 서로 볼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B) 눈이 두 개든 열 개든 서로 봐도 상관없다. 저쪽에 대한 현출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현출은 어떤 현출인가? 그 현출은 시각적 현출이다. 그 현출은 시각적 현출일 뿐이다. 시각적 현출만으로는 아직 이것이 신체라고 하는 그런 인식을 경험할 수 없다. (교수님) 타인 경험 정도일 듯하다. (A) 타인 경험조차 안 될 것이다. 물리적 사물 혹은 환영 비슷하게 경험될 것이다. (교수님) 장인이 눈을 뜨게 된 상황에서 공이 날아오는 걸 보고 자기에게 날아오는 것인지 연결이 안 되어서 맞게 되었다고 한다. 경험적인 실험을 통해서 이 내용이 증명되었다고 알고 있다. (D) 장인이 눈을 뜨게 된 사례에서도 눈은 이미 장인의 것으로 육화되고 있다. 신체와 사물 사이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데 그걸 확인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A)
*순전히 눈적인 주체가 가지는 사물 현출들(Dingerscheinungen)은 무엇인가? 여기서 사물 현출도 우리가 가지는 사물 현출과 똑같을지 다를지 알수 없다. 실제적인 사물을(reale Dinge)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할 때 다음과 같이 따옴표를 쳐야한다고 생각한다. “실제적인(reale)”.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는 상당히 복잡하니까. (교수님)
Man wird nicht sagen, der nur Sehende sieht seinen Leib, denn es fehlte ihm die spezifische Auszeichnung als Leib, und selbst die mit der Freiheit der kinaesthetischen Abläufe Hand in Hand gehende freie Bewegung dieses “Leibes” machte ihn nicht zum Leib.
It cannot be said that this subject who only sees sees his Body, for its specific distinctive feature as Body would be lacking him, and even the free movement of this "Body," which goes hand in hand with the freedom of the kinesthetic processes, would not make it a Body.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보기만 하는 것이[순전히 눈적인 주체가] 자신의 육체를 본다고. 왜냐하면 그것은[단지 보기만 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로서의 고유한 탁월성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네스테제적인 경과들의 자유와 함께 동반하여 이행되는 이러한 “육체”의 자유로운 운동마저 그것을[“육체”를] 육체로 만들지 않는다.
*die Auszeichnung : marking (=aus : 밖으로 + zeichnen : 표시하다) / der Ablauf : 달려감, 유출, 경과, 만료 (=ab- : 동작의 종결 + der Lauf : 뛰기, 진행) / die Bewegung : 운동, 이동 / mit etw. Hand in Hand gehen : 협력하여(동반하여) 이행하다
*순전히 눈적인 주체에게 육체가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눈만 있는 주체도 신경세포도 있고, 시신경도 있고, 진짜 눈과 똑같다. 그러면 자연과학적 의미의 신체, 생물학적/생리학적 신체도 있다, 그러나 현출하는 신체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신체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신체가 없다는 것이다. Leib라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현출하는 신체를 뜻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눈만 가지고 있는 주체에게는 신체로서의 탁월한 특성, 변별적 특성이 없다. (교수님) 순전히 눈적인 주체를 상상해서 관찰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순전히 눈적인 주체가 자연과학적 신체나 생물학적/생리학적 신체를 가진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순전히 눈적인 주체 입장에서는 그것이 안 된다. 이 친구 입장에서는 맨 아래층 경험이 안 되니까 그 위에 쌓아올려지는 위층도 경험이 안 될 것이다. (D) 그런 세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타인 경험이 필증적이다. (A) 생활세계적 구성이 있어야 학적 구성이 가능하다. 밑에 층 없이는 위에 층이 없을 것 같다. 신체로 경험할 수 없으면 물리학적 신체로도 경험 안 된다. 그럼 눈만 가지고 있는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가 뭔지 알 길이 있을까? (교수님) Leib에 대한 이해가 Körper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건가? (A) 자기 신체에 한해서 그렇다. 현출하는 자기 신체가 없는데 그것이 생물학적 신체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D)
눈만 가지고 있는 주체가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치자. 눈이 자기 돌리고 싶은대로 돌아간다. 이렇게 자유로운 운동조차도 “신체”(“Leib”를 따옴표 했다. 정말 신체라고 불러야 될지가 문제니까.)를 신체로 만들어주진 못한다. 아무리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신체라고 할 수 없다. 신체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촉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촉각이 있어야만 현상하는 신체에 대한 경험이 가능하다. 이 경우에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은 현출하는 신체를 가질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교수님)
*’Auszeihnung’을 이전에 등장한 용어(Vorzug - 특권)와의 동일성을 위해 ‘특권’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떤가? (E) 의미는 통하겠지만 엄밀하게는 ‘Auszeihnung’에 그런 어원적 의미가 없어서 그렇게 번역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D)
Es wäre dann nur so, wie wenn das Ich in eins mit dieser Freiheit im Kinaesthetischen das materielle Ding Leib unmittelbar frei bewegen könnte.
In that case, it would only be as if the Ego, in unity with this freedom in the kinesthetic, could immediately and freely move the material thing, Body.
그 경우에는 다만 이와 같을 것이다. 마치 자아가 하나 속에서[일체가 되어] 키네스테제들 내이러한 자유와 더불어 물질적 사물[로서의] 육체를 직접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wie wenn : as if
*순전히 눈적인 주체가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물질적 사물로서의 신체(materielle Ding Leib)는 무엇인가? 여기서도 “물질적(materielle)”이라고 따옴표 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물질이 아닐 수 있으니까. 그냥 물질적이라고 써놓으면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적 사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순전히 눈적인 주체는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적 사물과 똑같은 것일지는 알 수 없는 그런 물질적 사물을 경험한다. 눈 주체는 현상하는 신체를 움직이는 건 아니다.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움직인다고 할 순 있을텐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현출하는 신체가 아닌 어떤 것을 움직인다.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수님)
*의지, 운동의 자유도 촉각이 가진다는 특권을 가지는 것 아닌가? (B) 여기서 자유롭게도 따옴표 쳐서 써야 한다. “자유롭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유와 같지 않을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암암리에 경험하는 자유와 똑같은 자유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눈 주체를 보기엔 자유로운 것 같은데 실제로 눈 주체에게 그런지 아닌지는 모른다. 거의다 따옴표를 쳐주면서 읽어야 한다. (교수님) 우리가 의미하는 자유가 맞다. 그 주체 입장에서도. (B)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이른바 신체를 현출하는 신체로서 경험하지 못한다. 촉각의 우선성을 탁월하게 분석할 것. (교수님) 촉감각이 없이 직접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신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C) 나는 여기서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후설이 ‘wie wenn’을 썼다고 생각한다. ‘wie wenn’은 as if, 마치 그러하다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wie wenn’ 이후로는 다 따옴표 쳐져 있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D)
Der Leib kann sich als solcher ursprünglich nur konstituieren in der Taktualität und allem, was sich mit den Tastempfindungen lokalisiert wie Wärme, Kälte, Schmerz u.dgl.
The Body as such can be constituted originarily only in tactuality and in everything that is localized with the sensations of touch: for example, warmth, coldness, pain, etc.
엄밀한 의미의 그런 육체는 촉각성과 [다음과 같은] 모든 것들 속에서만 근원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 촉감각을 통해서 위치지어진 [모든] 것들 [속에만 말이다]. 따뜻함, 차가움, 고통 등등과 같은.
*als solcher : as such (그런, 보통 말하는 그런, 엄밀한 의미의 그런)
Eine wichtige Rolle spielen ferner die Bewegungsempfindungen.
Furthermore, the kinetic sensations play an important role.
운동감각은 나아가 [육체 구성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ferner : furthermore
Ich sehe, wie sich meine Hand bewegt, und ohne daß sie sich abtastend bewegt, empfinde ich Bewegungsempfindungen, aber in eins mit Spannungsempfindungen, Tastempfindungen und lokalisiere sie in der sich bewegenden Hand.
I see how my hand moves, and without it touching anything while movꠓing, I sense kinetic sensations, though as one with sensations of tension and sensations of touch, and I localize them in the moving hand.
나는 본다, 어떻게 내 손이 움직이는지를, 그리고 그것이[내 손이] 더듬으면서 움직이지 않아도 나는 운동감각들을 감각한다. 하지만 긴장감각들, 촉감각들과 함께 하나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운동감각들을] 움직이는 손 속에 위치지운다.
*die Spannung : tension (←spannen : tighten, stretch)
Und so für alle Glieder.
And the same holds for all the members of the Body.
그리고 모든 신체부분들에게도 그러하다[마찬가지이다].
*das Glied : (복수) 사지/신체, 마디/지절/관절, (쇠사슬의) 고리, 구성원/일원
Taste ich dabei, so erhält zugleich die Tastempfindung Lokalisation in der tastenden Fläche der Hand.
If, while moving, I do touch something, then the touch sensation immediately acquires localization in the touching surface of the hand.
만약 내가 그때 만진다면, [나는] 동시에 손의 만지는 표면 속에 촉감각 위치화를 획득한다.
*erhalten : receive, keep, maintain (=er- : 획득 + halten : 붙잡다)
Im Grunde verdanken wohl die Bewegungsempfindungen ihre Lokalisation nur der ständigen Verflechtung mit primär lokalisierten Empfindungen.
At bottom, it is owing only to their constant interlacing with these primarily localized sensations that the kinetic sensations receive localization.
근본적으로, 확실히 운동감각들은 그것들의 위치지움을 오로지 일차적으로 지속적인 얽힘에게, 위치지워지는 감각들과의 [지속적인 얽힘에게] 빚지고 있다.
*Im Grunde : at bottom, fundamentally (←der Grund : ground) / A verdanken et. jm. : A는 ~에게 ~을 신세를 진다 / wohl : (강조) 참으로 / ständig : 지속적인, 끊임없는 / die Verflechtung : 얽힘 (=ver- : 완결, 결과 + flechten : 엮다, 꼬다) / primär : primary
Da aber hier keine genau abgestufte Parallelität waltet wie zwischen Temperaturempfindungen und Tastempfindungen, so breiten sich die kinaesthetischen Empfindungen nicht abgestuft durch die erscheinende Extension aus, sie erfahren nur eine ziemlich unbestimmte Lokalisation.
But because there obtains here no parallelism which is exactly stratified as there is between temperature sensations and touch sensations, so the kinesthetic sensations do not spread out in a stratified way over the appearing extension, and they receive only a rather indeterminate localization.
그런 경우에는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운동감각들과 촉감각들(일차적으로 위치지워진 감각들)의 지속적인 얽힘과 관련해서] 정확한 등급적인 평행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온도감각들과 촉감각들 사이와 같은. 그와 같이 키네스테제적 감각들은 등급적으로 밖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현출하는 연장을 통해서. 그것들은[키네스테제적 감각들은] 어떤 상당히 비규정적인 위치지움을 경험한다.
*da : (시간적) 그때, 그당시에, (공간적) 저기에, 여기에, (추론) 그런 경우에는, 그렇다면 / hier : (시간적) 지금, 현재, (공간적) 이곳에, 여기에서, (문장) 이것과 관련해서, 이 대목에서 / abstufen : 층계를 내다, 차등화하다 (grade) / walten : 지배하다, 존재하다 (cf. Gewalt : 힘, 권력, 위력) / ziemlich : 상당한
*“등급적인 평행성(abgestufte Parallelität)”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온도감각과 촉감각은 규정적이다. 그래서 만지면 ‘어우 손가락 끝은 차구나, 손바닥은 더 따뜻하구나’ 이렇게 느낄 수 있다. ‘밑으로 만지면 더 따뜻하구나, 끝으로 가면 덜 따뜻하구나’하고 등급지워진다. 근데 운동감각과 촉감각 사이에는 그런 게 없다. 위치화가 상당히 느슨하게 비규정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업)
Sie ist darum noch nicht bedeutungslos, sie macht die Einheit zwischen Leib und frei beweglichem Ding inniger.
Yet this is indeed not without significance; it makes the unity between the Body and the freely moveable thing more intimate.
그것은[상당히 비규정적인 위치지움은] 그로 인해[정확한 등급적 평행성의 부재로 인해] 그래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육체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물 사이의 통일성을 더 긴밀하게 만든다.
*die Einheit : unity / beweglich : moveable (=bewegen : 움직이다 + -lich : 성질, 소유) / innig : intimate
*육체(Leib)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물(frei bewegliches Ding)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교수님) 바로 앞 문단 마지막 문장과 대구를 이루며 똑같이 구별되는 것 같다. (F) 촉감각적 신체와 운동하는 “신체”로 구별된다. (D) 똑같은 사물도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신체도 한 번은 내 신체로 파악할 수 있고, 한 번은 움직일 수 있는 사물로 파악할 수 있다. 위치화가 설령 비규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두 파악을 밀접하게 만들어주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교수님)
Der Leib wird natürlich auch gesehen wie jedes andere Ding, aber zum Leib wird er nur durch das Einlegen der Empfindungen im Abtasten, durch das Einlegen der Schmerzempfindungen usw., kurzum durch die Lokalisation der Empfindungen als Empfindungen.
Obviously, the Body is also to be seen just like any other thing, but it becomes a Body only by incorporating tactile sensations, pain sensations, etc. - in short, by the localization of the sensations as sensations.
육체 또한 당연히 각각의 다른 사물처럼 보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각각의 다른 사물처럼 보여지는 육체는] 육체가 된다,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통해서. 더듬음 속에서 감각들의 삽입[을 통해서], 고통감각들 등등의 삽입을 통해서, 요컨대 감각들로서 감각들의 위치화를 통해서.
*einlegen : 넣다, 삽입하다 (=ein- : 안으로 + legen : 놓다, 눕히다) / kurzum : 요컨대
An der Lokalisation nimmt dann auch der visuelle Leib teil, weil er sich mit dem taktuellen deckt, wie sich auch sonst visuell und taktuell konstituierte Dinge (bzw. Phantome) decken, und so erwächst die Idee eines empfindenden Dinges, das gewisse Empfindungen “hat” (Tast-, Druck-, Wärme-, Kälte-, Schmerzempfindungen usw.) und haben kann unter gewissen Umständen, und zwar als in ihm primär und eigentlich lokalisierte;
In that case the visual Body also participates in the localization, because it coincides with the tactual Body, just as other things (or phantoms) coincide, ones which are constituted both visually and tactually, and thus there arises the idea of a sensing thing which "has" and which can have, under certain circumstances, certain sensations (sensations of touch, pressure, warmth, coldness, pain, etc.) and, in particular, have them as localized in itself primarily and properly.
그 위치지움에 시각적인 육체 또한 관여한다. 왜냐하면 그는[시각적인 육체는] 촉각적인 [육체]와 합치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시각적이고 촉각적으로 구성된 사물들 (내지는 환영들) 또한 부합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처럼 어떤 감각하는 사물의 [즉, 육체의] 이념이 불러일으켜진다. [감각하는 사물은] 특정한 감각들을 “가진다” (접촉-, 압박-, 따뜻함-, 차가움-, 고통감각들 등등). 그리고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 가질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감각하는 사물] 안에 일차적이고 본래적인 위치화으로서 [가질 수 있다.]
*teilnehmen an : ~에 함께하다, 관여하다 / sich decken : 부합(일치)하다 / sonst : 그 외에 / gewiss : 일종의, 일정한 / der Umstand : circumstance
*왜 “가진다(hat)”에 따옴표를 쳤을까? (F) 가진다고 하면 능동적인 것이지만 감각을 가짐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따옴표 쳤다고 생각한다. (교수님)
*’gewisse’를 ‘확실한’으로 번역하면 어떨까? 앞에서 물질적 사물이 다 사기라고 하는 경우에도 위치감각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촉감각들도 위치감각들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어서 악령의 기만 속에서도 내적 체험의 명증성 같은 걸 가진다. 그래서 ‘확실한’으로 번역해도 좋을 것 같다. (C) ‘gewisse Empfindungen’이라고도 얘기하지만 ‘gewissen Umständen’이라고도 얘기하고 있어서 두 대목에서 ‘gewiss’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면 이 맥락에서 ‘확실한’의 뜻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앞서 말씀하신 얘기는 맞는 얘기다. (A) 모든 감각은 확실하다. 그건 촉감각 뿐만 아니라 시감각도 그렇다. 다만 시감각의 경우 그것의 위치화가 확실하지 않을 뿐이다. 의식에 명증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둘 다 똑같다. (교수님)
감각의 명증성과 관련해서 토론한 적이 있다. 감각의 명증성은 ‘x라 경험한다.’에서 성립하는지 ‘x라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에서 성립하는가. 나는 전자를, 친구를 후자를 지지했다. 어느 쪽이 맞는가? (A) 화이트보드는 하얀색인가? 그렇다. 그런데 황달기가 있는 사람은 노란색으로 보인다. 화이트보드가 희다고 하는 것은 상호주관적으로 참이고, 화이트보드가 노랗다고 하는 것은 상호주관적으로 거짓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이 저것이 흰색으로 보인다, 황달기 있는 사람이 저것이 노란색으로 보인다고 하면 그건 참이다. 내게 어떠어떠하게 보인다, 이건 거짓일 수 없다. (교수님) 자기의식(self-awareness)에 대해서도 똑같은가? (A) 그 자아가 어떤 자아임에 따라 달라진다. 자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때, 그 자아가 신체와 정신이 결합된 자아일 때, 그게 틀릴 가능성이 있는가? 있다. 화이트보드가 노란색이다처럼 내 얼굴이 노란색이다는 틀릴 수 있다. 자기 출생년도 같은 것도 틀릴 가능성이 있다. 주민등록증이 틀렸을 수도 있고, 부모님이 잘못 기억해서 전달해주셨을 수도 있고, 여튼 틀릴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세계 속에 있는 자아로 인식될 경우에는 어떤가? 후설은 그것도 틀릴 수 있다고 한다. 세계가 틀릴 수 있으니, 내지는 세계가 없을 수 있으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가 틀릴 수 없다고 한다. 근데 후설은 틀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정립을 괄호치고 그대로 주어지는 자아는 틀릴 수가 없다. (교수님) 그렇다면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을 하면 무조건 틀릴 수 없나? (A)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틀릴 수 없는 것 아니고, 거기에서 필증적 환원을 해야 한다. 필증적 양상에서 포착될 수 있는 것만 무조건적 참이다. 발생적 현상학에서 자아는 흐름의 주체이고, 그 흐름 안에는 과거의 것, 현재의 것, 아주 먼 과거의 것, 명증적 들어오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나, 이렇게 얘기하면 필증적 환원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하고 필증적 환원을 수행하면, 그 떄 주어지는 자아는 필증적 자아이다. 초월론적 환원은 일반적인 환원이고, 그후로 무수하게 많은 환원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상호주관적 환원도 있고, 자아론적 환원도 있고, 앞서 언급했듯이 필증적 환원도 있고, 무수히 많은 환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자아의 측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 자체가 환원이다. 「egological reduction and intersubjective reduction」이라는 논문을 참고하라.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것이 그래서 엄청나게 다양한 환원이 있는 것이고, 또한 끊임없이 환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 다양한 환원을 수행해야 한다. 환원은 search light와 비슷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교수님)
초월론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경험도 의심 가능할 수 있고, 불확실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인 것처럼 보인다’만 확실하다면, 자연적 태도에서 ~인 것처럼 보인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초월론적 환원은 보다 확실한 것을 찾아나서는 것 아닌가. 근데 초월론적 경험의 명증성이 의심가능하다면, 자연적 태도에서의 경험의 의심가능성과 뭐가 다른가. 초월론적 태도의 성과가 무엇인가? (A) 우선, 자연적 태도에서도 “나에게 ~인 것처럼 보인다.”라는 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을 세계 속에서 얘기하는 한 틀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틀림이 없다고 얘기한 것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이후 필증적 환원을 한 경우를 상정하고서 얘기한 것이다. 예를 들면, ‘19xx x월 x일 태어난 나’는 틀릴 가능성이 있다. ‘키가 ~cm인 나’도 틀릴 수 있다. 그런 조항을 달면 안 된다. 에포케하고 초월론적 주관으로 경험을 하고, 거기서 불확실하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걸 제외한 상태에서 –필증적 환원(apodictic reduction)을 수행한 상태에서- 나에 대한 필증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교수님)
지금 『이념들2』에서 구성하는 몸과 구성되는 몸이 구분되는 이 분석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이후 필증적 환원을 한 것인가? (E) 초월론적 환원 이후, 몸에 대한 환원(bodily reduction, leiblich reduktion)을 한 것이다. 주제화하는 것 자체가 환원이다.
초월론적 환원을 얘기할 때 확실성과 무관하게 얘기하는 게 좋다고 본다. 물론 후설이 처음에는 확실성을 주제화하여 탐구하였다. 그래서 많은 오해가 발생했다. 초월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초월론적 주관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환원을 보편적 현상학적 환원(universal phenomenological reduction)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한 쪽에는 초월론적 주체가 나오고 저쪽에는 구성된 세계 내지는 세계들이 드러난다. 상호주관적으로 다 있는, 나 혼자 만이 아니라 다른 초월론적 주관들이 같이 있는 상태, 다시 말해 나의 초월론적 주관의 흐름뿐만 아니라 다른 흐름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주관들이 이런 영향을 주고받는 영역이 있고, 그에 관련한 무수히 많은 구성된 세계가 있다. 이렇게 두 쪽으로 나눠진다. 그걸 제대로 우리가 영역별로 분석하기 위해서 환원이 필요하다. 구성하는 주관은 상호적인 주관이고, 우리 모두가 초월론적 주관으로 드러난다. 그 주관들에 의해 구성된 모든 세계들, 같이 구성하는 세계도 있고 개별적인 구성하는 세계도 있다. 노에시스 쪽에서는 초월론적 주관들이 드러나고 노에마쪽에서는 세계들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 둘 사이에는 상관관계(korrelation)이 있다. (교수님)
초월론적 환원을 확실성의 증가 과정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오해는 거부의 이유가 아니다. 자연적 태도에서의 경험과 초월론적 태도에서의 경험 사이에 확실성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성의 증가가 환원을 통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확실성의 증가만이 목표는 아니겠지만 필연적으로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A) 필연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론적 환원 이후 필증적 환원을 해야 확실성이 증가한다. (교수님) 나와 즉자적인 사물 사이의 관계와 나와 구성물 사이의 관계는 서로 다르다. 내가 어떤 즉자를 해석할 때에는 확실성이 매우 떨어지지만 구성물로 경험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A) 즉자가 뭔가? (교수님) 즉자는 소박한 태도에서의 사물이다. (A) 그런데 환원을 수행하기 전에는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었었나? (교수님) 주체였다. (A) 그렇다. 다만 안 드러났을 뿐이다. 즉자라고 얘기했을 때 그런 인상을 줬다. 환원 이전에는 즉자의 세계로 주어지고, 구성된 세계다. 구성된 세계는 초월론적 환원 전에는 우리와 무관한 세계이다, 이런 인상을 나에게 줬다. (교수님) 초월론적 환원 이전에도 구성물인데. (A) 맞다. 자기가 다 구성해놓고 망각한 것이다. 그리고 즉자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적 태도이다. (교수님) 원래는 즉자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될까? (A) 원래도 즉자로 주어지지 않는다. 후설이 이까지 얘기하지는 않지만 내 나름의 고유한 생각이다. 자연적 태도는 발생적 관점에서 볼 때 이차적인 것이다. 망각을 하고서 하는 얘기다. 본래적인 모습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예컨대 어린애들은 의미망으로 세계를 보지, 자기와 상관적으로 생각하지, 자기와 무관하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초월론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고 본다, 단지 그걸 모를 뿐이다. (교수님)
후설의 텍스트와 거리가 생기는 것 아닌가? (A) 언급한 대목은 후설의 이야기하지 않은 대목이다. 밝혀야 할 대목이다. 어린아이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이다. 그 의미가 혼동스럽다고 하더라도. 원래는 그렇게 의미의 세계로 자기가 구성을 해나가며 살다가 어느 순간 그걸 망각한다. 망각하고 세계가 즉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을 하면 되돌리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어린아이가 그렇게 의미로서 세계를 구성해나가는데 그 재료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즉자적인 세계를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자연적 태도에서 즉자적인 세계는 아니다. 어린아이가 맨 처음에 의미로서의 세계를 구성할 때, 맨 처음에 무에서 구성할 순 없다. 뭔가로부터 구성을 해야 하는데, 그 뭔가로부터의 세계, 그 뭔가라고 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어린아이가 맨 처음 세계를 구성할 때 조우하는 그 세계, 의식이 한 번도 가닿지 않은 그 세계가 있다. 후설은 그것을 초월론적 초세계, 초월론적 모나드의 총체라고 한다. 그것이 밑바닥에 있고, 그것이 다양한 것으로 경험된다.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이론은 이 방면으로 보완되어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 다른 방면으로는 아까 여러 가지 종류, 차원의 환원이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방면으로도 더 수정보완되어야 한다. 데카르트적 환원의 기렝서 확실성을 증가시키는 apodictisch reducktion이 다양한 종류의 환원 중 하나다. 이 두 번째 길도 후설이 많이 닦아 놓았다.
어린아이는 왜 망각하는가? (H) 망각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의미로서의 세계를 구성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망각하게 될까. 물론 개인마다 그 이유와 시점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망각이라는 게 두부 자르듯이 망각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망각하면서 깨우쳐지고 그렇다. 완전한 망각은 없다. 자연적 태도에서 살면서도 문득문득 안다. 살면서도 세계라는 게 의미를 가진 것으로 느껴진다.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등장 이전에도 이런 진리를 체득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천재들 이 그렇다. 종교는 세상을 보는 눈을 확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초월론적 환원에 종교철학적 의미가 크다. 이와 관련해서 네이버 열린 연단 강의를 하였다. 강연과 김태희-이남인 질의응답을 같이 보면 좋을 것이다. (교수님) 망각이 무엇인가? (H) 자신이 창조적인 주관이라는 사실을, 사실 그런 주관이면서도 잊는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조차 이런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는 못하니까. 이때 망각은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망각이다. 구성을 시작함과 동시에 망각의 길로 접어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깨달아야 할 어느 시점이 오는 것이다. 그로부터 온갖 종교가 나온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최종적으로는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이루어졌다. 현대 현상학(contemporary phenomonology)의 종교적 전회(religious turn)는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와 불교가 현상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야기해보겠다. 불교를 먼저 이야기해보겠다. 불교 중에 유식불교가 있다. 유식, 오직 식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현장이 인도에서 15년간 유학 후 유식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 그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와 정리를 해서 『성유식론』이라는 한문으로 쓴 책을 냈다. 인도에 있던 유식불교 자료들은 많이 사라지고, 지금은 이 책이 남아서 유식불교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책을 보면, 윤회 같은 불교적인 세계관 이야기만 빼면, 소름돋을 정도로 후설의 현상학과 유사하게 인간 의식을 분석한다. 후설 현상학과 일치하는 게 엄청나다. 성유식론 내용은 초월론적 현상학이다. 유식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다 마음의 조화라는 뜻이다. 초월론적 현상학적 얘기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거다. 그리고 유식무경이라고 말한다. 오직 식밖에 없고 세계가 따로 없다는 뜻이다. 이게 초월론적 현상학의 근본 주장 아닌가. 이제 기독교를 이야기해보겠다. 구교든 신교든 큰 차이는 없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별일 뿐이다. 기독교 교리, 성경을 들여다보면 초월론적 현상학적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성서를 보면 옛날사람, 새로운 사람을 이야기한다. “옛사람의 옷을 벗어던지고 새사람의 옷을 입어라.” 새사람은 기독교 진리를 아는 사람이 새사람이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는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다. 이전 상태에서 확 바뀐 사람이다. 그렇다면 헌사람과 새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사람들이 보는 세계가 다르다. 착취하는 인간과 사랑하는 인간.
어쩌면 인류의 탄생부터 인간은 초월론적 현상학을 계속해왔다. 다만 의식적으로, 학문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다. 양해 동서를 넘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선사들, 기독교의 성인들과 훌륭한 신자들, 모두 초월론적 현상학을 한 사람들이다. 다만 개념적인 양태가 없었을 뿐이다. 『위기』에 따르면, 후설은 일차적으로 근대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학문적 관점에서 초월론적 현상학을 했지만, 초월론적 현상학이 학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책, 『예술본능의 현상학』에서 한 것은 예술의 초월론적 현상학이다. 도덕 문제에 대해서도, 예술적 차원에서도, 종교적 차원에서도 할 수 있다. 환원의 세계가 한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졌다. (교수님)
das sodann Vorbedingung ist für das Dasein aller Empfindungen (und Erscheinungen) überhaupt, auch der visuellen und akustischen, welche aber in ihm keine primäre Lokalisation haben.
This is then a precondition for the existence of all sensations (and appearances) whatsoever, the visual and acoustic included, though these do not have a primary localization in the Body.
그것은[감각하는 사물은] 나아가 전제 조건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감각들 (그리고 현출들)의 현존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시각적인 것들[감각들]과 청각적인 것들[감각들][의 현존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시각적인 것들과 청각적인 것들]은 그리고 그 안에 일차적인 위치지어짐은 없다.
*sodann : 그리고 나서, 게다가, 나아가서 / die Vorbedingung : 전제 조건 (=vor- : fore + bedingen : 의무지우다, 약정하다) / das Dasein : existence(현존) / überhaupt : 일반적으로, 통틀어
(수업 : 이남인, <서양현대철학연습> (2022-2))
(영역 : Richard Rojcewicz and Andre Schuwer(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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