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상학 일차문헌

[후설] "더 높은 대상성들의 구성을 위한 육체의 중요성" (『이념들2』 2부 3장 39절)

현담 2022. 12. 2. 18:10

39Bedeutung des Leibes für die Konstitution höherer Objektitäten.

Significance of the Body for the constitution of higher Objectivities

더 높은 대상성들의 구성을 위한 육체의 중요성

*die Bedeutung : 의미, 중요성

 

   Darüber hinaus ist nun der Leib auch bei allen anderen “Bewußtseinsfunktionen” dabei, und das hat seine verschiedenen Quellen.

   Now, besides this, the Body is involved in all other" conscious functions," and that has its various sources.

   더 나아가 이제 신체는 또한 모든 다른 의식기능들에서도 관여하고 있고, 그것은[신체에 관여함은] 자신의 상이한 원천들을 가지고 있다.

 

*darüber hinaus : 더 나아가 / dabei sein : 관여하고 있다,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다 / die Quelle : source

 

In unmittelbarer Anschauung gegebene Lokalisation und darin gründende Leibesbezogenheit haben nicht nur die sinnlichen Empfindungen, die für die Konstitution der Sinnendinge, der erscheinenden Raumobjekte, konstitutive Funktion haben, sondern auch Empfindungen ganz anderer Gruppen, so die “sinnlichen” Gefühle, Lust- und Schmerzempfindungen, das den ganzen Leib durchströmende und füllende Wohlbehagen, das allgemeine Mißbehagen der “körperlichen Verstimmung” u.dgl.

Not only the sensations which exercise a constitutive function as regards the constitution of sense-things, appearing spatial Objects, not only these sensations have a localization given in immediate intuition along with the relation to a Body grounded therein, but that is also true of sensations belonging to totally different groups, e.g., the "sensuous" feelings, the sensations of pleasure and pain, the sense of well-being that permeates and fills the whole Body, the general malaise of" corporeal indisposition," etc.

O1) 무매개적 직관 안에서 소여된 위치지워짐과 O2) 그안에 근거지워진 신체연관성을 V) 가진다. S1) 감관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 감각사물들의, [다시 말해] 현출하는 공간대상의, 구성을 위한 구성적 기능을 가지는 [감관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S2) 완전히 다른 집합들의 감각들 또한, 다음과 같은, “감관적인감정, 쾌락- 그리고 고통감각들, 몸 전체를 가로질러 흐르고 가득 채우는 안락함, “신체적인 언짢음의 일반적인 불편함 등등 [또한].

 

*das Gefühl : 감각, 감정, 느낌 / die Lust : 쾌감, 욕망 / durchströmen : 가로질러 흐르다 / füllen : 가득 채우다 / das Wohlbehagen : well-being, comfort (=wohl : well + das Behagen : 쾌적) / das Missbehagen : discomfort / die Verstimmung : indisposition, disgruntlement

 

*이 문장에서 주어를 무엇으로 해야 할까? 문법적으로는 앞에 두 개가 주어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뒤에 두 개도 주어가 될 수 있다. 이럴 때에는 내용을 가지고 주어를 결정해야 한다. 위치지어짐과 신체연관성이 감각들을 가지는 것보다 감각들이 위치지어짐과 신체연관성을 가지는 게 더 말이 된다. 그러면 앞에 두 개는 목적어다. 1격과 4격이 도치되는 경우가 있으니, 앞에 나왔다고 주어로 생각하기보다는 내용으로 주어를 판단하자. (수업)

 

*S1) 객관화적 작용의 토대가 되는 감각과 S2) 비객관화적 작용의 토대가 되는 감각을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S2)까지도 그런 위치지어짐과 신체연관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S1) 감관감각은 대상인식을 위해 필요한 감각이다. 지금까지 주제화된 것은 이러한 객관화적 작용(인식작용)의 사물 경험의 토대가 되는 감관감각의 위치화와 신체연관성이었다. 그런데 그것뿐만 아니라 S2) 감관적인 감각들과 완전히 다른(ganz anderer) 종류의 감각들 또한 위치화와 신체연관성을 가지더라는 것이다. 비객관화적 작용 중에서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중에서 감정 쪽의 비객관화적 작용의 토대가 되는 감각들을 언급하고 있다. 결국 S1), S2) 모든 감각들은 다 위치화와 신체연관성을 가진다. 유의할 점은 객관화적 작용의 토대가 되는 감각들과 비객관화적 작용의 토대가 되는 감각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 객관화적 작용과 비객관화적 작용 일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런데 1) 감관 감정, 2) 쾌고, 3) 안락함과 불편함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1)2)는 몸 전체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2) 못에 찔리면 찔린 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고, 이빨이 아프다. 그리고 1) 특정 신체 부위에 느끼는 감정이 있는데 지향적 상태에 이르지 못한 감정들이 감관적 감정이다. 둘 다 특정한 부위와 관련된다. 근데 3)은 몸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밖에 있는 대상들과 연결된다. 몸 전체를 가로질러 흐르고 가득 채우는 감정들은 세계 전체를 향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계 전체를 향해 작동하는 감정을 기분(stimmung)이라 부른다. 그래서 여기서도 Verstimmung(언짢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연히 좋은 기분도 있다. 여기서 몸 전체를 관통하는 기분을 다루기 시작하면 기분의 현상학으로 넘어갈 수 있다. 기분은 하이데거 현상학의 핵심 주제다. 하이데거 현상학은 기분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다. 후설은 기분에 관한 주제를 이미 04-14 유고에서 다루고 있고, 후기 유고 여기저기에서도 다룬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서도 기분에 대한 분석의 단초가 보인다. 그래서 이 텍스트는 많은 의미가 있다, 이쪽 저쪽으로 나갈 수 있는 씨앗들이 많다. (교수님)

 

Hierher gehören also Gruppen von Empfindungen, die für die Wertungsakte, intentionale Erlebnisse der Gefühlssphäre, bzw. für die Konstitution von Werten als deren intentionalen Korrelaten eine analoge Rolle spielen als Stoff wie die primären Empfindungen für die intentionalen Erlebnisse der Erfahrungssphäre, bzw. für die Konstitution von raumdinglichen Objekten.

Thus here belong groups of sensations which, for the acts of valuing, i.e., for intentional lived experiences in the sphere of feeling, or for the constitution of values as their intentional correlates, play a role, as matter, analogous to that played by the primary sensations for what is intentionally lived in the sphere of experience, or for the constitution of Objects as spatial things.

여기 이쪽으로[완전히 다른 집합들의 감각들로] 이처럼 감각들의 집합들이 속한다. [감각들은] 가치평가작용, [] 감정영역의 지향적 체험들을 위해서, 내지는 그것의[지향적 체험들의] 지향적 상관자들로서 가치들의 구성을 위해, 질료로서 하나의 유사한 역할을 맡는다. 일차적인 감각들이 경험영역의 지향적 체험을 위해, 내지는 공간사물적인 대상들의 구성을 위해 [질료로서 맡는 유사한 역할을 말이다].

 

*die Wertung : valuation / das Erlebnis : 체험 / analog : ~에 상응하는, 유사한

 

*’가치평가작용(Wertungsakte)‘에서 작용(Akte)’은 현상학 전문 용어로서 지향적 체험을 말함. (수업)

 

*‘일차적인 감각들(primären Empfindungen)’은 여기서 촉감각 뿐만 아니라 대상인식을 위해 필요한 감관감각들, 즉 객관화적 지향성의 토대가 되는 감각들을 말함. (수업)

 

*좋다, 나쁘다 같은 감정이 가치평가와 연결된다. 후설은 <인식, 감정, 실천>이라 초기에 생각했다. 그런데 지정의라는 것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후기에 생각이 바뀌게 된다. 지정의 작용은 함께 들어가 있다. 예컨대, 수업 시간인 지금 인식 작용이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순전히 인식 작용만 있는가. 인식 작용을 가만히 뜯어보면, 매순간 파악하고, 파악하고 계속 이어지는데, 매번 파악할 때마다 수업내용을 잘 따라가면 기분이 좋고 아니면 언짢다. 인식작용에는 기분 좋음과 기분 나쁨과 같은 가치 작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좋고 나쁘다는 평가작용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알고자 하는 욕구, 앎의 본능, 객관화하는 본능(objektiv Instinkt), 호기심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욕구가 충족되면 기분 좋고 아니면 답답하다. 그리고 객관화적 작용, 좁은 의미의 아는 작용도 그것의 존재 때문에 나오게 된다. 우리가 인식작용이라는 걸 살펴봐도 거기에 지정의가 있다. 좁은 의미의 인식작용, 정서작용, 실천작용이 있는데, 그 밑에는 본능이 있어서 이 세 가지를 추동시켜준다. 본능은 이 세 가지 측면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추동해주는 힘이다. 그러니 지정의가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정서작용이라고 얘기하는 것, 미적인 경험, 미적인 지각, 예컨대 어떤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 어떤 음악작품을 감상한다라고 할 때, 기분 좋거나 나쁘다는 감정이 주가 되지만 거기엔 감상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창작할 때는 창작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서 창작한다. 또 한쪽에는 음악 작품을 이해하려면 마디마디 인식해야 하는데, 이때 좁은 의미에서 인식작용이 있다. 결국 구체적인 정서작용 속에도 세 가지가 있다. 예술 경험의 서로 다른 세 측면인데, 그것이 왜 가능한가. 내 생각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험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쉴러 같은 경우는 미적인 유희 충동, 놀이 충동, 이게 모든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라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아직 지정의 세 영역을 나눠서 보고 있다. 지적인 지향작용, 정서적 지향작용, 의지적 지향작용으로. 그 밑바닥에 무수히 많은 감각들(empfindungen)이 있다. (교수님)

 

In weiterer Folge gehören hierher mancherlei schwer zu analysierende und zu besprechende Empfindungen, welche die stofflichen Unterlagen des Begehrens- und Willenslebens bilden, Empfindungen der energischen Anspannung und Relaxion, Empfindungen der inneren Hemmung, Lähmung, Befreiung usw.

Moreover, all kinds of sensations, difficult to analyze and discuss, belong here as well, ones that form the material substrate for the life of desire and will, sensations of energetic tension and relaxation, sensations of inner restraint, paralysis, liberation, etc.

더 나아가서 여기 이쪽으로[완전히 다른 집합들의 감각들로] 가지각색의 분석하고 논의하기 힘든 감각들이 속한다. 욕구적- 그리고 의지적 삶의 질료적 토대를 형성하는 감각들, 힘의 긴장과 이완의 감각들, 내적인 주저함, 마비, 풀림의 감각들, 등등.

 

*mancherlei : 여러 가지의, 가지각색의 / besprechen : discuss / die Unterlage : 토대 / das Begehren : desire / energisch : ener / die Hemmung : inhibition / die Lähmung : paralysis / die Befreiung : liberation

 

*지정의 얘기했는데 이제 의() 영역도 얘기하고 있다. 그 밑바닥에도 다양한 종류의 감각들이 있는 것이다. (교수님)

 

All diese Empfindungsgruppen haben als Empfindnisse eine unmittelbare leibliche Lokalisation, sie gehören also für jeden Menschen unmittelbar anschaulich zum Leib als seinem Leib selbst als eine vom bloß materiellen Ding Leib durch diese ganze Schicht der lokalisierten Empfindungen sich unterscheidende subjektive Gegenständlichkeit.

All these groups of sensations, as sensings, have an immediate Bodily localization. Thus, for every human being, they belong, in a way that is immediately intuitable, to the Body as to his particular Body, i.e., as a subjective objectivity distinguished from the Body as a mere material thing by means of this whole stratum of localized sensations.

이 모든 감각집합들은 위치감각으로서 어떤 직접적인 육체적 위치화를 갖는다. 그것들은[이 모든 감각집합들은] 그러므로 각 인간에 있어 직접적으로 직관적으로 육체에 속한다, 그의[각 인간의] 신체 자체로서, [] 순전한 물질적인 사물인 육체와 이러한 위치화된 감각들의 전체적 층을 통해 구별되는 주관적인 대상성으로서.

 

*sich von et.3 unterscheiden : ~과 구별되다

 

*여기서 후설이 직접적인(unmittelbar)’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려면 이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직접적인 것은 촉감각뿐이기 때문이다. (정훈) 동의한다. 그래도 직접적이라고 보이는 감각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 감각들 중에서 더 직접 위치화가 되는 감각들을 분석하고 있다. (교수님)

 

*물질 사물로서의 신체를 소문자 body 또는 Körper라고 하고, 구성하는 신체를 대문자 Body 또는 Leib라 하는데, 자연적 태도에서는 Körper이고, 현상학적 태도에서 Leib인가? 다시 말해, 자연적 태도에서 보이는 신체와 현상학적 태도에서 보이는 신체의 구분과 KörperLeib의 구분이 같이 가는가? 나는 다르다고 보는데, 이차문헌에서는 같이 간다고 보더라. (A) 이차문헌의 구분은 잘못된 구분이다. 신체는 자연적 태도에서도, 초월론적 태도에서도 Leib로 파악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Körper로도 파악될 수 있다. 자연적 태도에도 두 가지가 있다. 자연과학적 태도와 일상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에서는 Körper로 파악이 되겠지만, 일상적 태도 속에서는 Leib로 파악될 수 있고, 초월론적 태도에서는 이 두 가지가 다 보일 수 있다. 초월론적 태도에서는 말하자면 Körper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도 보이고, 자연적 태도에서 leib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이고, 더 나아가서는 초월론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보인다. 자연적 태도에서는 물론, 그 전에 얘기한 바에 따르면 구성적 기능이 드러나긴 한다. 그런데 세계 전체의 구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연적 태도에서는 신체가 세계 전체에 대해 구성하는 건 안 드러나는데. 초월론적 현상학에서는 그게 다 드러난다. (교수님)

 

*위치화된 감각들의 층(Schicht)이 무엇인가? (B) 위치화될 수 있는 다양한 감각들이 겹겹이 위치화되어서 그런 것 아닐까? (D) 지난 번엔 감각의 강도의 정도였다. (G) 여기서는 지난 번 뜻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구성의 층이 아닐까? 여기서는 위치화된 감각의 층이 맨 밑바닥에 있다고 한다.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층이 형성되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층이 형성된다. 그럼 구성의 층을 어떻게 분석하는가. 발생적으로 층을 분석할 것이냐. 아니면 타당성으로 층을 분석할 것이냐, 이에 따라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이 갈라진다. (교수님) 발생적으로 추적하면 맨 밑에 층에는 본능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는 왜 위치감각이라고 하는가. (E)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분석이 심화되지는 못한 것이다. (교수님)

 

Mit dieser Schicht verbinden sich aber die intentionalen Funktionen, die Stoffe erhalten geistige Formung, wie oben schon die primären Empfindungen Auffassung erfahren, in Wahrnehmungen eingehen, auf welche sich dann Wahrnehmungsurteile aufbauen usw.

The intentional functions, however, are bound to this stratum ; the matter receives a spiritual forming, just as, discussed above, the primary sensations undergo apprehension, are taken up in perceptions, upon which, then, perceptual judgments are built, etc

그런데 이러한 층과 지향적 기능들은 결합된다, [말하자면] 질료들은 정신적인 형성을 획득한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차적인 감각들은 파악을 경험한다, 지각 속으로 들어간다. 그 후 그 위로 지각적 판단이 쌓아 올려진다, 등등.

 

*geistig : 정신적인 / die Formung : 형성 / w.o. = wie oben :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기서 3개의 층을 이야기하고 있다. <감각(Empfindungen) 지각(Wahrnemungen) 지각 판단(Wahrnehmungsurteile)>. (교수님) 지각과 지각 판단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E) 저기에 대상이 있다고 하는 의식이 객관화적 작용이다. 지각은 선술어적 객관화적 작용이고, 판단은 술어적 객관화적 작용이다. (교수님)

 

Auf diese Weise ist also das gesamte Bewußtsein eines Menschen durch seine hyletische Unterlage mit seinem Leib in gewisser Weise verbunden, aber freilich, die intentionalen Erlebnisse selbst sind nicht mehr direkt und eigentlich lokalisiert, sie bilden keine Schicht mehr am Leib.

Hence in this way a human being's total consciousness is in a certain sense, by means of its hyletic substrate, bound to the Body, though, to be sure, the intentional lived experiences themselves are no longer directly and properly localized; they no longer form a stratum on the Body.

이러한 방식으로 이처럼 한 인간의 총체적인 의식이 자신의 질료적 토대를 통해 자신의 육체와 모종의 방식으로 결합한다. 그러나 물론, 지향적 체험들 자체는 더 이상 직접적이고 본래적으로 위치지어지지 않는다. 그들은[지향적 체험들은] 더는 육체 위에 층을 쌓아올리지 않는다.

 

*in gewisser Weise : in a certain way / hyletisch : 질료적인 = stofflich / freilich : of course

 

*어쨌든 전체 의식이 휠레적 토대(hyletische Unterlage)를 통해서 모종의 방식으로 신체와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향적 체험들의 위치지어짐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지향적 체험들의 위치지어짐(lokalisieren)이 아예 안 되는가? (교수님) 질료적 토대로 간접적으로 된다. (A) 그렇다. 직접적이고 본래적으로는 안 된다. 직접적이고 본래적으로 되는 건 촉감각뿐이다. 비지향적 체험의 토대들로서 감각들은 그래도 직접적이고 본래적인 위치화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완벽한 의미에서는 아니다. 그러나 지향적 체험의 경우에는 신체에서 직접적인 층을 형성하지 않는다. (교수님)

  위치화가 신체와의 관련성으로 변경되는 것 같다. 앞에서는 촉감각인데 이제 여기서 이렇게 얘기하면 일관적이지 않다. (B) 소리는 직접적으로 위치화가 되지는 안 되지만, 간접적으로는 귀에 위치화가 되고, 색깔은 눈에 위치화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넓게는 직접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원래 직접적인 위치화는 촉각에 대해서만 성립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개념을 느슨하게 쓰는 것이다. 위치화 개념에 등급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교수님) 신체와의 관련성 경험이 위치화되어 경험이 되면, 위치화의 경험 집합과 신체와의 관련성 경험 집합과 외연이 똑같아져서 이상하게 읽히진 않닸다. 다만 위치화 개념을 느슨하게 쓴 건 맞다. 위치화를 통해 신체와의 관련성을 획득하는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A) 나는 감각이 아니라 지향적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감각으로부터 지향적 체험이 성립하더라도 지향적 체험 자체가 위치화될 수 있는가? 지향적 체험이 육체와 관련이 된다면, 정신이 육체라는 점에서 사후적으로 관련된 것이지 오감적인 위치화와 같은 방식으로 관련된 것은 아닌 것 같다. (B) 뇌만 의식을 낳는다는 생각이라면 너무 인위적인(artificial) 생각이다. 인지과학쪽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수님) 뇌와 상관 없이 정신적으로 내가 하고 있다는 수준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신의 육화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B) ‘내가 하고 있다.’에서 를 신체적 연관성과 관련짓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가. 정신의 육체화를 전제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비판하면, 전제하지 않음을 전제한다는 건데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교수님) B씨 이야기는 ‘1+1=2’를 계산할 때 거기 위치화가 전혀 안 느껴진다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D)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B)

 

Die Wahrnehmung als tastendes Auffassen der Gestalt sitzt nicht im tastenden Finger, in dem die Tastempfindung lokalisiert ist, das Denken ist nicht wirklich im Kopf anschaulich lokalisiert wie die Spannungsempfindnisse, die es sind u.dgl.

Perception, as the touching apprehension of form, does not have its seat in the touching finger in which the touch sensation is localized; thinking is not actually localized intuitively in the head, the way the impressions of tension are, etc.

모양의 촉각적 파악으로서 지각은, 만지는 손가락 안에 자리하지 않는다, 그 안에[만지는 손가락 안에] 촉감각이 위치지어진다. 생각은 실제로는 머리 안에 직관적으로 위치지어져 있지 않다. 긴장[위치]감각들이 그러하고[직관적으로 위치지어져 있고] 기타 등등[이 그러한 것과] 같이 [말이다].

 

*촉감각과 촉지각은 다르다는 이야기. 촉지각은 촉감각처럼 자리를 지정해줄 수 없다. (수업)

 

*‘anschaulich’‘intuitiv’의 차이가 있을까? (형준) 전자가 더 생동적인 뉘앙스이고, 후자는 이론적인 뉘앙스이다. (교수님)

 

Daß wir öfter reden, als wäre es so, ist kein Beweis, daß wir es wirklich anschauend so auffassen.

That we very often speak as if it were so is no proof that we actually apprehend it that way in intuition.

우리가 가끔 마치 그것이[생각이] 그러한 것처럼[머리 안에 위치지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는 증거가 아니다.

 

*der Beweis : proof

 

Die mitverflochtenen Empfindungsinhalte haben wirklich anschaulich gegebene Lokalisation, die Intentionalitäten nicht, und nur in Übertragung werden sie als leibbezogene, auch als im Leib seiende angesprochen.

The co-intertwined contents of sensation have a localization which is actually intuitively given, but the intention ali ties do not, and only metaphorically are they said to be related to the Body or to be in the Body.

[지향적 체험들과] 함께 얽혀있는 감각내용들은 실제로 직관적으로 소여되는 위치화를 갖는다. 지향성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단지 전용[의미의 전이된 사용] 속에서만 그것들은[지향성들은] 육체연관적이고 또한 육체 내에 있는 것으로 불려진다.

 

*verflechten : 엮다, 짜맞추다 / der Inhalt : 내용 / die Übertragung : 운송, 양도, 전용 / ansprechen : address

 

(수업 : 이남인, <서양현대철학연습> (2022-2))

(영역 : Richard Rojcewicz and Andre Schuwer(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