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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참주의 무지에 관한 플라톤과 에픽테토스의 입장 분석 및 비판

현담 2023. 4. 10. 13:26

무지한 참주의 무지에 관한 플라톤과 에픽테토스의 입장 분석 및 비판

 

  본고의 목적은 고르기아스466b-470c강의119장에 언급되는 참주에 대한 플라톤과 에픽테토스의 입장을 각각 분석하고 비교한 후 평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주는 죽이고 싶은 자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이다. 참주라고 해서 꼭 무지(無知)할 필요는 없지만, 플라톤과 에픽테토스가 논의하는 참주는 그의 무지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의 분별없는 행사에 도취된 자이다. 본고는 이러한 무지한 참주의 무지를 두 철학자가 각각 어떻게 이해했는지 분석한 후, 둘 사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차이점을 토대로 둘을 짧게 비판한다.

 

1. 고르기아스466b-470c : 정당함과 부당함에 관한 무지

 

  플라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한다면, 그는 자신이 하는 바로 그 행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목적이 되는 그걸 원하”(467d-e)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행위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좋은 것, 나쁜 것,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중간적인 것)으로 빠짐없이 분류되는 있는 것들 중 좋은 것만이다. “우리는 좋은 것들을 원하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들을 원하지 않으며, 나쁜 것들을 원하지도 않”(468c)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주가 어떤 행위를 한다면, 그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의 정의는 어떤 때는 좋은 것에 참여하고 어떤 때는 나쁜 것에 참여하며 어떤 때는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468a)인데,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는 때에 따라 나쁜 것인 비난과 처벌을 가져옴으로써 나쁜 것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470a).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것들을 위해 중간적인 것들을 행”(468b)한다. 따라서, 참주가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를 한다면, 그는 그 행위 자체가 아닌 다른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참주가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지성을 갖지 못한 자라는 점이다. 참주는 그 지성이 없기 때문에 비록 자신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466e). 다시 말해, 참주는 자신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하게끔 해주는 지성을 결여하기에 자신에게 실제로 좋은 것과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것 사이의 괴리가 일어나 후자에 치중할 뿐 전자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주는 마치 바닷물을 증발시킨 후 그 이슬을 마셔야 비로소 갈증을 해소할 수 있지만 그것을 모르고 계속 바닷물만을 들이키는 해상 표류자와 유사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참주를 비참한 자들이라 평가하고 그를 가엾게 여긴다. 물론 우연찮게 참주가 누군가를 정당하게 죽일 경우 앞의 비유를 이어가자면 표류자가 우연찮게 소나기를 만나 빗물을 마시는 경우에 대응할 수 있겠다- 에도 그가 비참하고 가엾은 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참주가 지성의 결여로 말미암아 누군가를 부당하게 죽이는 이상 비참하고 가엾은 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지성 혹은 무지는 무엇에 관한 것인지이다.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는 대체 언제 좋은 것에 참여하고 언제 나쁜 것에 참여하는가?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라도 정당하게 그런 행위들을 할 때는 더 좋지만, 부당하게 할 때는 더 나쁜 것이네.”(470c) 참주의 무지는 정당함과 부당함에 관한 무지다.

 

2. 강의119: 자유와 본성에 관한 무지

 

  플라톤이 정교한 논증을 통해 참주의 무지를 드러냈던 것과 달리, 에픽테토스는 가상의 참주가 자신(‘’, 에픽테토스)에게 우쭐거리며 내뱉을 발언들을 일종의 무지의 증상으로서 검토하면서 그의 무지를 진단한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참주의 발언 세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참주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참주는 의 욕구가 결코 방해받지 않도록 할 수도, ‘의 혐오가 회피하고 싶은 것에 결코 떨어지지 않도록 할 수도, ‘의 충동이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할 수도 없으며, 참주 자신의 욕구와 혐오와 충동조차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참주는 때에 따라 기술적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참주의 힘은 이처럼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크게 제한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둘째, 참주는 자신에게 모두가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도 인간으로서 참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추종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를 추종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참주는 쓸모 있는 도구나 당나귀 혹은 피하고 싶은 병이 관심을 받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뿐이다. 참주가 받는 관심은 정확히는 참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참주가 미치는 이해(利害)에 대한 관심으로 드러난다. 셋째, 참주는 의 몸을 구속하며 자신이 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지(프로하이레시스)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인 는 그러한 행위가 참주에게 이득이 될 것으로 보인다면 그렇게 하라고 대꾸하며 나아가 당신은 내 시체의 주인이네. 그거나 잡으시게나.”(1.19.9-10)하고 조롱할 뿐이다. 참주는 결코 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의 의지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다만 의 몸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뿐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참주가 보이는 자신의 힘, 자신이 받는 관심, 자신의 주인됨 등에 관한 착각은 모두 인간의 자유와 본성에 관한 무지로부터 비롯된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는 본성적으로 자유로운 것이기에 자신 이외의 다른 무언가에 의해 혼란스럽게 되거나 방해받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1.19.7-8). 의지가 이러하기에 참주는 자신의 힘을 의 의지에까지 투사하지 못하고 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의 바깥은 부자유한 인과의 영역이다. 예컨대, 참주조차도 가 아니라 그 자신이 비를 좋아할지라도 비를 내리게 할 수도, 비를 싫어할지라도 비를 그치게 할 수도, 맑은 날 비 맞고 싶은 충동을 옳은 것으로 만들 수도 없다. 또한 배 위에서 참주는 바다 위 인과적 현상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데에 능한 선장과 선원에 항해를 맡겨야지 그들에게 자신의 권력으로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수 없다. 이처럼 참주는 절대적 자유의 영역인 의지의 영역은 자신의 것이 아닌 이상 개입할 수 없고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영역은 인과의 강한 개입을 받아 부자유하게 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물론 참주는 자신의 지상 권력이 타인의 신체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이 사물이 끼치는 영향과 유사하고 그것을 판단하는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혼란스럽거나 두려운 것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나아가,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이성적인 동물로서 인간이 지닌 자연 본성공통의 이익에 무언가를 기여하지 않는 한 어떤 그 자신의 고유한 좋음들을 얻을 수 없도록만들어졌다(1.19.13-14). 참주가 자신을 제외한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힘을 행사하고 관심을 받고 주인이 되고자 하는 행위는 이러한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그는 처럼 자신에게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는 그러한 본성공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그러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1.19.11-12). 다시 말해, 참주는 본성에 맞게 자신을 위하고자 하는 일이 공통의 이익에 기여하는 일임을 모른다.

 

3. 고르기아스강의: 무지의 비교와 입장 비판

 

  『고르기아스강의에서 참주의 무지는 각각 정당함과 부당함에 관한 무지와 인간 자유와 본성에 관한 무지로 분석되었다. 이번 장에서는 이 두 무지들 사이의 주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토대로 플라톤과 에픽테토스의 입장을 평가할 것이다.

  두 무지는 공통적으로 참주가 자신이 강한 힘을 행사한다고(강력하다고) 착각하게 한다. 고르기아스에서 플라톤은 “‘힘을 행사하는 것이 힘을 행사하는 자에게 좋은 어떤 것을 뜻한다고 규정한다. 힘의 행사가 좋은 것이려면 그것이 그것의 목적으로서 좋은 것의 획득에 기여해야만 하는데, 참주는 좋은 것을 결정하는 기준인 정당함을 알지 못하기에 힘의 행사가 좋은 것의 획득에 기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앞서 살펴보았듯 기여하는 경우가 원리상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참주들이 나라에서 가장 작은 힘을 행사한다고 주장”(466d)한다. 한편, 강의에서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을 의지의 영역으로 한정하고 그밖의 영역을 자유가 침해받는 곳으로 규정하면서 참주가 행사하는 자의적 힘의 영역을 그 자신의 의지의 영역으로 원리상 한정한다. 그의 물리적 힘은 누군가의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과 내적 영향의 여부는 순전히 그 누군가의 의지의 몫이다. 에픽테토스는 짐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이다!’라고 외치는 참주(1.19.2)에게 그렇다면 너의 힘은 어디까지 미치는가?”(1.19.4)라고 반문하며 그의 힘이 결코 다른 인간보다 더 강력하지 않음을 인지시킨다.

  두 무지의 차이점은 그 공통점을 살펴본 바로 위 문단에서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다. 플라톤이 정당함의 내용을 466b-470c 내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참주가 내적으로 지녀야할 지성만이 정당함의 내용을 알려줄지라도, 정당함 자체는 참주의 내적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정당함은 참주에 의해 우연적으로라도 성립할 수 있다. , 정당함에 관한 무지와 정당함 사이에는 어떤 불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픽테토스에게서는 참주가 자신의 내적 영역을 넘어선 것들에 자의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에 힘쓰는 순간 그것은 그릇된 가치 부여이고 그 힘은 원리적으로 가치 획득에 무능하다. 참주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인 자신의 의지의 영역 내 욕구, 혐오, 충동들에 힘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자신에게만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인간으로서 지니는 내적 본성인 자기화의 본성을 따르는 행위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때서야 공통의 이익에 기여하면서 고유한 좋음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자유와 본성에 관한 무지는 자유와 본성의 실현과 연속적이다. 이러한 플라톤과 에픽테토스의 입장 차이는 참주가 아닌 참주에게 핍박 당하는 자에 대한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자는 부당하게 죽이는 자보다야 덜하지만 역시 가엾고 비참한 자임을 암시한다. 또한 불의를 저지르기보다 불의를 당하고 싶어하는 것이냐는 폴로스의 질문에 자신은 어느 것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선 밝히고 둘 중에서는 차라리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 대답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암시와 태도는 불의가 불의를 당하는 자 바깥에서 성립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만큼 크게는 않겠지만 어쨌든 불의를 당하는 자도 불의에 참여하게 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에픽테토스는 참주가 자신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든 자신의 목을 자르려 하든 의지를 본질로 하는 이른바 자유로운 제우스의 아들로서 자신을 절대 노예삼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또한 의지가 혼란스럽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관장하는 내적 영역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 에픽테토스는 공통의 이익에 기여하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을 것임에도 분명하다. 다시 한 번 자유와 본성은 인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성립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이 차이점을 바탕으로 본고가 다룬 텍스트상 한정된 범위와 본고의 한정된 지면에 유념하여 각 철학자의 입장을 짧게 비판해보고자 한다. 고르기아스466b-470c에서 플라톤에 따르면, 정당함(정의)과 부당함(불의)은 인간 행위자 외부에서 성립하지만 그것들을 인지하는 지성은 인간 행위자 내부에서 성립한다. 이때, 내부의 지성과 외부의 정의/불의가 매개되기 위해서는 어떤 외적 조건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나무를 어떻게 벨 줄 알더라도 나무를 실제로 베기 위해서는 톱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지성은 정의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 된다. 참주가 지성을 갖추지 못하여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 조건이 전무에 가까운 자, 가령 헐벗은 노예는 지성을 갖추더라도 정의를 실현할 수 없을 수 있다. 과연 이러한 귀결을 지성을 강조하는 플라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편, 강의119장에서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의지의 자유와 인간의 본성은 인간 행위자 내부에서 성립하고 외부의 영향은 다만 인간 내부를 관장하는 의지의 판단 자료일 뿐이다. 그런데 외부의 영향 자체가 의지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은 아닐지, 외부의 훈육과 교육이 자신의 이익과 공통의 이익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경향을 구성하는 것은 아닐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에 이를 때까지 항상 주인의 채찍과 당근에 따라 충실히 명령을 이행한 노예가 에픽테토스의 강의와 같은 책을 읽거나 책의 내용을 전해들은 기회가 없었다면, 그의 의지는 그래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한 그가 그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때 공통의 이익과 조화롭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그는 의지의 자유라는 경험 자체를 결여하여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공통의 이익에 기여하는 자기 고유의 좋음은 커녕 주인의 이익만을 위해 반공동체적”(1.19.14)으로 행위할 가능성이 크다. 에픽테토스는 비록 노예였지만 그가 겪은 특별한 경험들, 예컨대 스토아학파의 문헌 탐독이나 주인이 부여하고 보장해준 한정된 자율성의 향유 등이 그가 말하는 자유와 본성을 구성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