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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검토

현담 2023. 6. 7. 20:24

가제 : 에피쿠로스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검토

 

목차


. 서론
.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즐거운 삶의 중단으로서 죽음
. 결론

 

Against other things it is possible to obtain security. But when it comes to death

we human beings all live in an unwalled city. (VS 51 = LS 24B31)

 

. 서론

 

  어떤 인간도 그로부터의 안전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VS 51). 인간의 가장 확실한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인간에게 고통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면, 심신의 고통의 제거를 통해 쾌락의 한계에 이르고자 했던 에피쿠로스의 기획은 무너진다. 이러한 위험을 인지한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그것이 참임을 논증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을 보다 좁혀서 이해하자면 죽음은 인간에게 고통을 초래하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는 에피쿠로스가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로 나아가는 논증을 재구성하고 논증의 한 단면을 검토하고자 한다.

 

.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c)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게. (p1)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모두 감각에 달려 있지만, (p2) 죽음은 감각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Men. 124)

 

  (p1) 에피쿠로스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모두 감각에 달려 있다고 할 때, 그는 좋은 것을 첫 번째로 좋은 것이고 선천적인 것으로서 쾌락으로, 나쁜 것을 쾌락의 상대항인 고통으로 간주하고 있고(Men. 129), 그것들이 인간의 감각 능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좋은 것이 쾌락이고 나쁜 것이 고통인 한, 어떤 것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기 위해서는 인간에 의해서 감각되어야 한다. (p2) 그러나 인간이 죽으면 그는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p1)이 참이라면, 인간이 죽은 상태에서는 그에게 아무것도 좋거나 나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죽음을 죽은 상태 내지는 살아 있지 않은 상태”(Men. 125)로 고려할 때, (c)는 적어도 (c`) 살아 있지 않은 상태는 살아 있지 않은 인간에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c`)는 현대인인 우리에게 사소한 결론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시체가 훼손되는 것이 죽은 자신에게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거나(LS 24E6) 죽은 후 타르타로스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LS 24F1) 고대인에게는 상당한 희망을 주는 중대한 결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후의 고통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인간은 사후의 고통을 피하고자 불사(不死)를 고대하지 않아도 된다(Men. 124). 결국 실질적으로 (c`)는 이룰 수 없는 동경에서 비롯되는 결핍과 고통을 제거하는 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죽음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조차 아무것도 아니라는 가능성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해소하고자 한다.

 

(p3)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우리 곁에 와 있지 않고 죽음이 우리 곁에 와 있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Men. 125)

 

  (p3) 살아 있지 않은 상태는 살아 있는 상태의 부정형이다. 인간이 살아 있으려면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아니어야 하고, 인간이 살아 있지 않으려면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산 자에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곁에 와 있는 것혹은 주어지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주어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감각될 수도 없고, (p1) 감각될 수 없는 것은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일 수 없다. 결국 죽음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이 산 자에게 주어질 수도, 감각될 수도 없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러나 죽음은 간접적으로 산 자에게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고,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에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죽음이 고통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적어도 근거를 따질 줄 아는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쾌락과 괴로움을 상호 비교 측정하여 이익과 불이익에 주목”(Men. 129)해야 하는 인간이 두려워하면서 고통받는 것이 합리적인 경우는 그것이 더 큰 고통을 피할 수 있게 해주거나 더 큰 쾌락을 획득할 수 있게 해줄 경우인데, 인간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고통받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지 않으므로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p4) 왜냐하면 현실로 닥쳤음에도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을 미리 예상함으로써 괴로워하는 것은 근거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Men. 125)

 

  에피쿠로스는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서 죽음이 인간이 살아 있건 살아 있지 않건 그에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또한 그는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죽음이 두려움을 통해서 그에게 간접적으로 고통을 초래하지도 않을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을 나쁜 것으로 여기는 주요한 이유는 단지 죽음이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의 돌입이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의 마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음 이후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더라도 죽음 이전의 삶을 중단시키는 죽음은, “삶이 반길 만한 것”(Men. 126) 혹은 즐길 만한 것일 때, 쾌락을 차단하는 것으로서 고통일 수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삶의 중단이라는 점에서도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자는 삶을 회피하지도 않고 삶의 중단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p5) 삶은 거슬리는 일이 아니며 (p6) 삶의 중단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Men. 126)

 

  (프로포잘이 아니라 보고서가 될 것 같아 여기서 장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에피쿠로스의 전체 논증에서 논쟁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몸과 영혼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죽음은 그것의 분해라는 원자론적 가정에 입각한 (p2), 인간의 삶은 거슬리는 일이 아니라며 염세주의를 배격하는 (p5), 인간의 삶은 거슬리는 일이 아니고 즐길 만한 일인데도 삶의 중단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p6). 저는 이 중 (p6)를 검토하고자 합니다.)

 

. 즐거운 삶의 중단으로서 죽음

 

  Long and Sedley(1987: 154)에 따르면, 추가적인 쾌락을 상실하게 하는 죽음은 나쁜 것으로 보아야한다는 반론이 에피쿠로스에게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Long and Sedley는 죽음이 쾌락 고통, 좋은 것 나쁜 것의 중단이기 때문에 쾌락의 중단이 악이라 할지라도 죽음은 악이 아니라는 식으로 에피쿠로스가 재반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에 따르면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35년의 인생을 70년의 인생으로 늘어나게 할 확률을 미미하게 높이더라도, 그 두려움으로 인한 고통이 인생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기에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재반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한 인간이 삶이 즐거움을 안정적으로 구가하고 있을 때, 그래서 미래에 쾌락이 고통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될 때, 죽음은 악이 아닌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미래에 찾아올 큰 쾌락을 보존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때 우리가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합리적인 계산이 아닌가?

  Green(1982: 105)은 죽음의 바람직하지 않음(undesirability)을 이유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만 지속적 인생의 바람직함(desirability)을 이유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죽음이 악이 아니라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그것은 에피쿠로스가 죽음을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간주했을 때만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고통의 완전한 제거로서 행복에 도달하고자 하는 에피쿠로스의 기획은 실패한다.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언제나 자신의 즐거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보험에 가입하여 고통을 지불하면서 죽음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Voorhoeve(2018)는 적어도 정적 쾌락에 도달한 현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현자에게는 자신의 계속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의 좌절을 피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지 않고,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기껏해야 죽음을 악으로 볼 약한 자극이나 죽음에 대해 불안할 미약한 원인만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Voorhoeve, 2018: 235). 그러나 그는 아직 정적 쾌락에 도달하지 못한 자라면 죽음이 나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에피쿠로스의 핵심 교설들을 익히지 못하여 신과 죽음과 천체현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자에게 교설들을 익힐 기회를 박탈시키는 죽음은 악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거짓 의견들에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쉬운 욕망에 한정시키고, 또한 그러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쉬운 환경을 마련한 현자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정적 쾌락을 거의 해칠 수 없음(near-invulnerability)로 규정하고, 정적 쾌락 상태의 현자는 안전감, 활동에의 몰입, 자기 인생에 대한 주도감, 행복에 도달한 자신에 대한 정당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필자는 가장 즐거운 삶을 사는 현자에게만 오히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Voorhoeve의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현자의 상태를 거의 해칠 수 없음으로 규정하고 다양한 세부적인 쾌락들을 정적 쾌락의 내용으로 열거한 데에는 회의적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다. 여기에 현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현자는 자신의 삶이 언제든 죽음에 의해 중단될 수 있음을 포용한다. 에피쿠로스가 훌륭하게 살고 훌륭하게 죽는 연습은 같은 것”(Men. 126)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현자는 자신의 욕망을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에 한정하기 때문에 그의 쾌락이 쉬이 만족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거의 해칠 수 없는 것은 맞다. 하지만 현자는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미래가 요구되는 욕망을 제어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따라서 죽음에 고통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정적 쾌락의 상태는 역설적으로 거의 언제든 해쳐질 수 있다는 인식에 의해 거의 해쳐질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 정적 쾌락에 안전감, 주도감, 정당한 자부심 등이 내용으로 들어가기 어려워 보인다. 이런 것들은 거의 언제든 해쳐질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안전이 주어지는 순간순간에 대한 감사함,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일에서 벗어나 발생하는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일들에 대한 자신감, 정당한 겸허함 등이 내용으로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읽은 문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김주일 외 역, 파주: 나남, 2021.

Greene, O. H., “Fear of Death,” Phil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43(1), 1982, 99-105.

Long, A. A. and D. N. Sedley,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vol. 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Voorhoeve, A., “Epicurus on Pleasure, a Complete Life, and Death: A Defence,”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118(3), 2018, 225-253.

 

(읽어볼 문헌)

Mitsis, P., “Happiness and Death in Epicurean Ethics”, Apeiron 35(4), 2002, pp.41-56.

Rosenbaum, S., “How to be Dead and Not Care: A Defense of Epicurus,”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23(2), 1986, pp.2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