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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자연법과 천상의 자연법 :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

현담 2023. 5. 30. 14:06

지상의 자연법과 천상의 자연법 :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

 

  본고의 목적은 법률론114-18절과 자유의지론17-15절에 언급되는 인정법과 자연법의 괴리에 대한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비교한 후 비판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에게서 자연법은 인정법의 정당한 준거이며 두 법 사이의 괴리는 전자를 기준으로 좁혀져야 하지만, 인간의 자연본성에 기반한 법으로서 키케로의 지상의 자연법이 인정법과 근본적 차원의 괴리를 가지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섭리에 기반한 법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상의 자연법은 인정법과 근본적 차원의 괴리를 가진다. 필자는 이 근본적 차원의 괴리가 무엇인지 규명하고, 각자 입장에서 성립하는 괴리의 성격에 따라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서로 다른 비판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1. 자연법과 실정법의 괴리 : 지상에서의 괴리, 지상과 천상 간의 괴리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정법이 부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인정법이란 특정 인간 사회에서 실제로 제정되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법인데, 키케로에게서는 백성들의 제도나 법률로 제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인간들에게 인지되는 법률”, “국민을 다스리는 가운데 성문화된 저 법률등의 표현으로 지시된다. 인정법이 부당한 경우는 예컨대 다음의 경우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권력을 찬탈한 자가 시민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법, 타락한 국민이 범죄를 일삼는 자에게 정권을 위임할 자유를 허용하는 법.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이러한 경우들을 부당하다고 부르면서 각각 찬탈자를 내쫓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법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선량하고 유능한 자가 타락한 국민 대신 관직을 선임하게 하는 법이 실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근거, 즉 우리가 특정한 인정법이 부당하다고 평가하며 특정하게 변화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자연법에 있다. 자연법과 인정법의 괴리에서부터 인정법이 부당해질 수 있으며, 그것의 괴리를 좁힘으로써 정당한 인정법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법이 무엇에 기반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를 보이며, 그에 따라 인정법과 자연법의 괴리에 대한 양자의 입장이 분기한다. 키케로에게서 자연법은 바른 이성이 제정한 인간 사회를 결속하는 하나의 법이다. 자연본성에서 정의가 유래하고 도덕적 선악이 판별된다는 언급을 고려할 때 키케로의 바른 이성은 자연본성에 의거하여 명령하고 금지하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법의 토대가 자연본성에서 우러나 인간을 사랑하고 싶은 경향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보아 키케로의 바른 이성은 자연본성 중에서 특히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본성에 의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법을 제정하는 데에는 시민들 사이의 의견차와 대립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키케로는 인간이 공통된 인지력을 토대로 사물들을 인식하고 자신의 지성에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며 의견차와 대립의 해소 가능성을 낙관한다. 인간의 공통된 인지력은 곧 인간의 감관을 통한 감각 능력으로 보이는데, 감관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오도되지 않고 감관에 의한 감각은 지식이 그에 기초하는 확실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인간 감관의 공통성과 감각의 확실성이 인간 자신의 자연본성에 의거한 판별을 성립시키고, 특히 인간을 사랑하는 자연본성에 의거한 판별은 이성으로 하여금 인간 사회를 결속하는 자연법을 인식하도록 한다. 결국, 키케로의 자연법은 인간을 사랑하는 자연본성에 기반하며 인간 사회의 결속을 목적으로 한다. 자연법이 이러할 때, 특정 인간 사회에서 실제로 제정되는 법으로서 인정법과 인간 사회가 결속되기 위해 따라야 할 법으로서 자연법 사이의 괴리는 인간 사회라는 같은 차원, 인간 사회의 결속이라는 같은 목적 내에서 성립한다. 이러한 지상에서의 괴리는 인간 지성과 감관의 기만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인정법과 자연법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그러한 기만을 제거해야 한다.

  아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느님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섭리로 다스린다. 사물들의 질서를 자연이라고 규정할 때, 아구스티누스에게서 하느님의 섭리와 그것에 의해 모든 사물들이 질서정연해지는 것이 마땅한법인 영원법은 자연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상실 가능한 것에 대립되는 항구적인 것을 향하는(사랑하는) 질서를 사물들의 마땅한 질서로 시사한다. 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예컨대 두려움을 피해 생명을 보전하고자 하는 욕망은 선이라 할지라도, 체벌을 피해 주인을 죽이고자 하는 노예의 욕망은 한갓 상실 가능한 육체에 집착하여 항구적인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에 탓할 만한 욕망인 정욕이자 악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인간의 선은 언제 상실할지 모르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되돌리는 데에 있지만, 악은 그것들에 집착하는 데에 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특유의 자연본성인 자유를 부여받았기에 이런 선악 사이에서 선을 결정할 수도 악을 결정할 수도 있다. 결국, 아구스티누스의 자연법은 영원한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즉 선을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에 기반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세생활을 하는 사람들인 국민들의 현세생활을 돕기 위해 제정하는 인정법은 이러한 자연법에 의거하여 살인을 금하고 주인을 죽이는 노예를 벌하며, 만약 인정법이 그렇지 않다면 자연법에 의거하여 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세생활을 돕는다는 목적과 섭리를 따른다는 목적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미숙한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제대로 이룩하기 위해 인정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지만, 한갓된 신체를 영구한 영혼보다 사랑한다는 점에서 자연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연법이 인간의 세속적 생활을 용이하게 한다는 지상의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를 따른다는 천상의 목적을 가지기에 성립하는 자연법과 인정법 사이의 근본적인 괴리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키케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러한 근본적인 지상과 천상 간의 괴리가 존재하는 가운데 지상의 인정법이 자신의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다만 천상의 목적과 지상의 목적이 일치되는 곳까지 상벌을 내리고, 천상의 목적과 지상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괴리되는 곳에서는 천상의 자연법에 상벌을 미뤄두는 것이다.

 

2. 비판 : 지상에서의 괴리 문제, 지상과 천상 간의 괴리 문제

 

  키케로는 자연법과 인정법 사이 지상에서의 괴리를 좁힐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해 인간 감관의 감각에 기초한 공통된 인지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통된 인지력을 통해 공통된 자연법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다. 키케로는 끊임없이 쾌락에 기초한 정의와 법을 질타하며 자연본성으로 돌아가 정의와 좋은 법 판별하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쾌락에 기초하여 정의와 법을 판별하는 사람은 자신이야말로 인간 감관의 감각에 기초한 공통된 인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키케로는 선을 흉내 내는 쾌락이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감관에 깊이 스며들어감관을 기만하고 있으며, “공통된 인지력은 쾌락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반론할 수 있다. 하지만 키케로는 여전히 무엇이 기만당하는 감관이고 기만적인 감각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야 하며, 그를 통해 왜 쾌락주의자들이 기만당하는 자들인지 해명해야 한다. 키케로가 자연 본성상 선한 것들에는 이런 달콤한 맛과 매력이 결여되어있다고 말하지만, 필자는 사실 선한 것에는 그런 맛과 매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져 우는 아이를 일으켜세우고 다독이며 울음을 달래는 사소한 선행에조차 가슴을 흐뭇하게 만드는 기쁨이 있다. 이러한 기쁨과 강한 아이가 약한 아이를 때리고 으쓱해 하는 기쁨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고, 그러한 구별은 감각 차원에서 성립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연본성에 대한 지성적인 파악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법과 인정법 사이 괴리가 일어나지 않는 부분까지는 인정법을 자연법에 일치시키고, 근본적인 지상과 천상 간의 괴리가 일어나는 부분부터는 괴리를 인정하여 인정법이 내리지 못하는 상벌을 자연법이 내리는 식의 구도를 설정하였다. 지금의 구도는 자연법과 인정법에서 각각 규정하는 정의의 내용이 상반된다기보다는, 자연법이 더 강한 수준의 정의를 요구하여 서로 외연이 일치하지 않은 것처럼만 보였다. 그러나 자연법과 인정법에서 각각 규정하는 정의의 내용이 상반되어 인간이 상위법인 자연법을 따르게 될 때 인정법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하고 미숙한 인간들 사이에 평화가 파괴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국가가 타국의 압제를 피하고 독립적으로 번영하기 위해서는 타국과의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그 국가의 국민이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정당방위를 통한 살인이 정욕에 지배된 행위라면, 전쟁에서 타국 병사를 살인하는 행위 또한 자신과 동료 시민들의 생명 보전이나 조국의 안녕과 같은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이러한 지혜의 판단 하에 자신의 사랑을 되돌려 자연법에 따르는 선한 국민이 전투에 임하지 않거나 머뭇거린다면, 해당 국가는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하여 국민들이 현세에서 비참한 상황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당신의 기독교 공화국이 스파르타나 로마와 마주한다고 가정해 보라. 경건한 기독교인들은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두드려 맞고, 짓눌리고, 파괴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들에게 품은 경멸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것이다.”(김영욱 역, 168) 이런 경우를 인정하게 되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인정법의 정당성의 근원이 자연법에 있다고 볼 수 없는 영역이 성립하고, 그 영역을 확장해나갈 때 하느님의 섭리로서 영원법은 인정법을 정당화하는 준거로서 자연법의 역할을 점점 상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