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현상학 일차문헌

[후설] 『사물과 공간』 6부 "객관적 변화의 구성", 결어 - 주요 인용

현담 2023. 9. 7. 16:18

6부 객관적 변화의 구성

 

15장 지각대상의 질적 변화

 

이제까지 절대적으로 정지한 사물세계라는 허구를 꾸몄다. 이 사물세계는 단지 운동학적으로만 정지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도 불변이었다. 즉 공간을 채우는 모든 질들과 관련해서라도 불변이었다.(여기에서는 수반하는 질들은 도외시할 수 있다.) 우리가 시각적 사물을 다루었으므로, 각 사물의 전체 색채는 항상적이다. 이제 색채의 변화 가능성을 고려할 것이다. (연구 지대의 확장 : 색채 변화 가능성 / 비판적 의문 : 일차질료는 시각규정과 촉각규정이지만, 후설은 시각규정에서 어떻게 삼차원적 사물성이 구성되는지에만 너무 집중한다. 촉각규정에서는 어떻게 삼차원적 사물성이 구성되며 시각규정에서 구성될 때와는 어떻게 다른가? §78 공간형상과 질적 채움의 연관)

 

더 나아가 선경험적 색채와 대상적 형상 사이에는 기능적 관계가 있다. 대상의 형상이 대상의 특정 색채에서 현출한다면, 선경험적 색채는 (형상으로부터 규칙을 지시받는) 매우 규정적인 변양들을 겪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육면체가 이러저러한 종에 속하는, 균질한 빨간색이라면, 이 육면체 구성에는 (육면체 형식에 의해 규칙을 지시받는) 빨강 음영들의 체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이렇게 규칙을 받는 색채 변양들은 정지 사물을 현시하려면, 각 이미지 변양을 관통해야 한다. [...] 또 형상의 충족에서의 유형적 법칙성에 유념하면서, 이 형상의 색채가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사물성의 근본 형식인 순수 공간성을 얻으며, 이것의 질적 채움의 변화 가능성을 얻는다. (선경험적 색채와 대상적 형상 사이의 기능적 관계 : 형상으로부터 규칙을 지시받는 선경험적 색채의 규정적인 변양(음영들의 체계)이 특정 색채의 대상적 형상을 현출시킴. §78 공간형상과 질적 채움의 연관)

 

이제 새로운 근본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사물은 변화하면서도(정확히는 질적으로 변화하면서도) 동일자로 구성되는가? 이 사물은 형상은 동일하고 색채는 변할 때 통일적인 것이다. [...] 우리는 사물이 (오직) 질적으로 변하는 것을 지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 제기 : 우리는 (형상은 동일하고) 색채가 변하는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79 질적 변화에서 동일자인 사물)

 

사물은 다양체에서의 통일체이다. 이미지 변양들의 다차원적이고 무한한 다양체가 통일성 의식을 적재하는데, 이 통일성 의식은 이 다양체에서 변양이나 변화가 아니라 불변을 직관한다. 이런저런 색채를 지니고 정지한 사물을 직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색채가 변한다. [...] 이미지 색채는 지향을 충족하지 않고 실망시킨다. 이것이 다름(anders)’바뀜(geändert)’ 의식의 기초이다. 사물이 이제부터 다시 질적으로 불변하며 현출한다면, 이미지의 다음 색 변양 계열은 고정적으로 밑그림 그려진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파악은 (진행이 정상적이라면) 다시 계속 충족된다.

[...] 색채만 변하는 사물에 대한 현행 지각은 법칙적이고 무한한 지각 가능성들로부터 나온 지각의 한 노선이다. (색채 변화 지각의 기초 : 이미지 색채가 지향을 충족하지 않고 실망시킴. §79 질적 변화에서 동일자인 사물)

 

이제 우리는 각 위상을 고정된 것으로, 그리고 시간 지속에서 연장된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변화는 제한된다. 이제부터 완전히 불변하는 이것에서 변화는 끝나는 것이다. 안구운동 이미지에서 위상의 고정(Festlegung), 한 시간위치에서부터 이제 이미지가 (색과 관련하여) 색 정지라는 의미에서 변양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대상적 색 변화의 다름이 지니는 의미는 [] 정지에 조율된 예상이 실망됨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불변하는 대상 색이라는 정상 경우에서 나아가는 것과는 다르게 나아간다. 그리고 매 위상마다 (미리 정립된 것으로부터 연속적으로 이탈하면서) 다르게 나아간다. 물론 이 이탈의 속도와 가속도는 상이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탈 형식이 상이할 수 있다. (대상적 색 변화에서 다름의 의미 : 하나의 고정된 위상에서의 이미지의 색(‘불변하는 대상 색’)에 조율된 예상이 실망됨 / 이탈 형식 : 미리 정립된 것(‘불변하는 대상 색에서 기대되는 색채 변양)으로부터 색채가 이탈하며 다르게 나아가는 속도와 가속도 / 추가 연구 가능성 규정적 변양과 이탈적 변양의 차이? §79 질적 변화에서 동일자인 사물)

 

이 이탈 형식은 아주 임의적일 수 있거나, 혹은 전적으로 무법칙적일 수 있는가? [...]

[...] 이것을 임의적이라고 말할 수 없음은 쉽게 통찰할 수 있다. [...] 몸체는 각 순간마다 대상적으로 하나의 규정된 색을 지니고, 연속적으로 새로운 각 순간마다 새로운 색을 가지는데, 이때 변화의 종류와 속도는 대상적으로 규정적이다. 여기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 이것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임의의 위상을 고정한 후 시간 지속으로 연장한다면, 이 위상이 색에 있어서도 불변하는 정지 사물로 변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몸체가 위상에서 지닌 색이 이 몸체의 지속적 색이 되는 것이다. 이 색에는 가능한 지각들(가능한 이미지 변양들)의 무한한 전체체계가 대응한다. [...] 임의의 현실적이거나 가능한 (대상적 색 변화에 대응하는) 지각 계열은 색에 있어 고정적 법칙성을 지닌다는 것이고, [...] (대상적 변화에 대응하는) 각 가능한 지각 계열이 (색채가 불변으로 견지되고 키네스테제 정황이 동일할 때, 이 동일 사물에 속하는) 지각 계열에서 이탈하는 것은 법칙적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일어나야 한다. 변화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변이하는 이미지 색채들이 불변하는 경우와 다르게 나아간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를 위해서는, 변이하는 이미지 색채들이 법칙적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다르게 나아가되, (모든 가능한 지각 계열 일반에 있어) 달리 나아감의 법칙이 고정적으로 미리 지시되어 있어야 한다. (변화를 지각하기 위한 이탈 변양의 법칙성 : 변이하는 이미지 색채들이 법칙적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다르게 나아감 + 달리 나아감의 법칙이 고정적으로 미리 지시되어 있어야 함. §79 질적 변화에서 동일자인 사물)

 

지각의 어떤 임의의 행보(이차원 지각 다양체에서 나오는 한 지각 노선)를 따라가보자. 이미지들은 이미지들 B1, B2 등으로 표시할 수 있으며, 당연히 연속적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런 각 이미지는 특정 키네스테제 상황에 대응하는데, 이 상황은 간단히 상황 K1, K2 등으로 표시하자. 그러므로 시간 t1, t2 등에서 키네스테제 체험들은 K1 ... K2 ... 등으로 연속적으로 이행한다. 상황 K1에서 멈춘다면, B1은 형상은 변하지 않으면서 색은 연속적으로 변할 수 있다. 이제 색에 주의를 기울여 이를 F라고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K1이 K0로 이행하면, 사선으로 서로 이어진 F들은 연속적으로 이행한다. 이때 형상은 (위의 도해에서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정지 다양체의 변화들을 겪는다. 수직 계열은 같은 시간점에 속한다. 이 계열은 색채에 있어서 (서로 다른 가능한 키네스테제 상황에서, 특정한 대상적 색채 위상에 속하는) 색채 음영들을 재현하는 것이다. 대상적 색채가 해당 시간점부터는 변하지 않고 불변한다면, 수직 계열은 이 시간점이나 그다음 모든 시간점에서 모든 K에서의 색채를 지시할 것이다. [...] 여기에서 (키네스테제 계열 K1-K0가 동기화하는) 지각 계열에 대해 표시된 것은 모든 지각 계열 일반에 대해서, 그리고 삼차원 K체계 전체에 대해서 타당하다. (질적 변화 지각 도식. §80 질적 변화에 있어서의 현출변양들의 법칙성)

 

그러므로 여기에는 색 음영을 주재하는 놀라운 법칙성이 존재한다. 사물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색 음영의 법칙적 변이는 사물의 기하학적 음영의 법칙적 변이와 정확히 평행하여 진행된다. [...] 이제 사물의 기하학적 몸체성은 유지하면서 색이 변한다면, 다시 각각의 가능한 키네스테제 상황마다 형상 음영과 색채의 규정적 통일체가 대응한다. 그러나 형상 음영들에 있어서는 사태가 변하지 않아서, 이전 키네스테제 상황으로 순환적으로 복귀하면 동일한 형상 음영이 드러나는 반면, 색 음영들에 있어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러나 각 위상이 불변 정지로 펼쳐질 수 있음은 변화의 폐기할 수 없는 본질이므로, 각 위상에서 사물의 색 변화에는 사물의 불변 색채가 조응한다(그리고 여기에서 변화를 중단시킴으로써, 사물의 색채가 위상에 대응하여 지속할 이념적 가능성이 있다.) [...] 그러니까 색채 다양체가 형상 다양체와 합치하되, 새로운 색채 다양체가 불변의 형상 다양체와 연속적으로 합치한다. 하지만 변화가 가능하려면, 매 위상의 색채 다양체의 규정은 (시간 펼침을 제외하면) 그 일반 유형에 있어서 (색채가 변하지 않는 사물이 지닐) 색채 다양체 유형과 동일해야 한다. (질적 변화 시 색 음영을 주재하는 법칙성 : 새로운 색채 다양체와 불변의 형상 다양체의 연속적 합치 + 매 위상의 색채 다양체의 규정은 그 일반 유형에 있어서 색채 다양체 유형과 동일함. §80 질적 변화에 있어서의 현출변양들의 법칙성)

 

16장 한갓된 운동의 구성

 

이제 변화의 두 번째 근본유형인 운동으로, 우선은 특히 (질 변화와 형상 변화 없는) 한갓된 운동으로 넘어가자. 우리가 변화와 불변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발견한 것은, (변화의 매 위상에 불변의 한 유형이 상응한다면, 즉 사물 변화의 매 위상이 지속하는 불변 사물성으로 연장될 수 있다면) 불변하는 다양체 체계로부터의 이탈을 구속하는 어떤 법칙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물의 모든 변화 방식에 적용되며, 따라서 우리가 운동이라고 부르는 변화에도 적용된다.

[...] 그런데 이는 변화의 규범이 정지에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정지에서 대상은 연속하여 동일한 것이고, 구성하는 정지 다양체의 (앞서 기술한) 규정적 특성이 이 대상에 상응한다. 하지만 대상은 변화할 때는 연속하여 동일한 것이 아니다. 대상은 변하고, 여기에는 정지 다양체 체계로부터의 이탈(특히 현실적이거나 가능한 대상 현출진행에 있어서의 이탈)이 상응한다. 그러나 이 이탈은 임의적일 수 없다. 이 이탈은, 변화의 매 위상이 정지 위상으로 기능해야 하고 지속하는 정지로 연장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있는 것이다. (변화의 본질 : 매 위상이 정지 위상으로 기능한다는 전제 하에서 현출 진행에 있어 정지 다양체 체계로부터 이탈함. §81 모든 변화를 정초하는 동일성)

 

먼저 현상학적 지역을 살펴보자. 음 강도가 이산적으로 변하더라도, 음의 구체화(Konkretion)에서 무엇인가는 연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 도대체 무엇이라도 연속하면서 통일성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서로 무관한 두 사태가 차례로 나타날 따름이지, 하나의 사태는 없다. [...] 그러나 강도만으로는 음에 통일성을 줄 수 없다. 시간적으로 접하는 이산적인 두 음이 (두 통일체를 가로질러 연속적 계조를 지니는) 강도를 매개로 하나의 통일체가 되지는 않는다. [...] 강도는 바로 그때그때 의 강도이지만, 질이 강도의 질인 것은 아니다. 질이 (불변이나 변화의 방식으로) 연속적으로 유지되고 이를 통해 지속에서의 통일성이 구성되는 가운데, 비로소 (질적으로 지금은 이렇게, 다음에는 저렇게 규정되는 것으로서) 소리가 커지거나 작아지는 음이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의문스럽다. (강도가 변하는 음의 구체화 사례 : 연속적으로 유지되는 질을 토대로 지속에서의 통일성이 구성되는 가운데 강도가 변하는 [하나의] 음이 있게 됨. / 추가 연구 가능성 시각질, 청각질, 촉각질 등은 서로 어떻게 같고 다를까? §81 모든 변화를 정초하는 동일성)

*앞서 등장한 음의 구체화 사례 : “가령 도 음은 세기가 변한다. 우리는 시간흐름에서, 동일한 질의 위상들이 연속적으로 서로에게 넘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질적 공통성은 연속적으로 관통하지만, 연속적으로 다른 강도가, 음 강도라는 동일 유의 다른 종이 관통한다. 나아가 이 종[특정 음 강도]은 유[음 강도 일반]의 질에 의해 정초되며 제약되므로, 이는 한갓된 공재(Zusammen)가 아니라 내적 통일체이다. 그러니까 통일성 의식이 이 연속성을 관통한다. 지속 전체에 있어 동일한 도이지만, 강도는 변하여 늘 달라진다.”(§79 질적 변화에서 동일자인 사물)

 

이와 비슷한 것이 시각적 질(원주)과 시각적 펼침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에서 질은 통일성을 정초하는 충분한 근거가 아니다. 통일성을 위한 최종 정초는 여기에서 연장의 통일성이다. 동일한 연장이 (연속적으로나 이산적으로) 색채로 충족될 수 있다. 연장이 지속하는 통일체를 설립(stiften)하는 것이지, 질 혼자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 현상학적인 것으로부터 사물성이라는 대상적인 것으로 넘어가도 이는 적용된다. 공간형상의 통일성은 색채의 통일성의 기초이고, 모든 색채 변화에서 통일성의 기초이다. 이미지들의 연속적 흐름에서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고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언제나 이미지 연장들이다. 이에 따라 대상적으로도 공간 몸체는 모든 (종적 의미에서의) 질을 위한 히포케이메논, 즉 기체(Substrat)이다. 이것은 질의 담지자(Träger)로서 온통 질로 덮인다. [...] 연속적 전체의 모든 채움을 주재하는 법칙을 특수화(Besonderung)하면 여기에도 적용되는데, 이 법칙은 채움이 몇몇 위치에서만 이산적이라는 것(모든 곳에서 이산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체에는 (항상적이거나 연쇄적인) 색채 이산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질적 연속성을 매개로 하는 이산들일 뿐이다(이때 연속적 같음은 연속체로 간주된다.) (통일성의 정초 토대 : 현상학적 지역에서 연장, 대상적인 지역에서 공간 몸체 / 채움을 주재하는 법칙 : 채움이 모든 곳에서 이산적일 수는 없음. §81 모든 변화를 정초하는 동일성)

*가령 명도(명도와 색의 관계는 강도와 음의 질의 관계에 유비적이다.) 같은 규정들을 지닌 색을, 우리는 시각적 질이라는 명칭하에 통일적으로 파악한다. (원주)

*히포케이메논 : 변화하는 형상 저변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실체 혹은 본질 (역주)

 

이제 운동으로 돌아가자. 운동이 연속적임은 운동의 본질이다. 사물의 자기동일성은 사물이 지속하는 중에 기체(혹은 몸체)가 연속적으로 지속할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몸체성의 통일성은 (질적으로 이렇게 규정된) 사물의 통일성을 위한 기초이다. 그러나 [몸체성의] 통일성은 (몸체가 절대적으로 불변하든 변화하든 간에) 몸체성의 연속성을 전제로 한다. (원주) 그러니까 몸체는 연속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몸체 변화의 형식이 운동이라면, 이는 (모든 몸체 변화와 마찬가지로) 운동도 필연적으로 연속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사물의 자기동일성(통일성)의 토대 : 몸체성의 통일성 / 몸체성의 통일성의 토대 : 몸체성의 연속성 / 운동의 본질 : 모든 몸체 변화와 마찬가지로 연속적임. §81 모든 변화를 정초하는 동일성)

*몸체는 기하학적 몸체이다. (원주)

 

운동에서 우선 특징적인 면은 몸체가 여러 위치를 점유하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계속 동일자라는 점이며, 질적 불변까지 추가한다면 사물 전체는 계속 동일자라는 점이다. 이것은 어떤 같음인가? [...] 우리는 공존하는 두 사물이 (각 사물이 그 자체로 동일한 현출 다양체, 즉 완전히 같은 현출 다양체에서 구성된다면) 위치만 빼고 완전히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름을 위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은 오직 이들의 키네스테제 관계에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물과의 관계(여기 존재하는 전체사물성이 그 안에서 구성되는 포괄적 현출 연관)에 있을 수 있다. (운동에서의 같음과 다름 : 위치만 빼고 같음, 키네스테제 관계에 있어 다름. §82 위치 변화인 운동과 이에 대응하는 키네스테제 동기화)

 

세계에 도대체 [](die 번역 추가) 두 사물만 있다고 가정하면, 둘을 구별하는 데에는 이것[키네스테제 관계]으로 족하다. 두 사물의 상응하는 현출들에서 키네스테제 배정은 서로 다르며 서로 달라야 한다. [...] 그러니까 같음이 구성되는 것은 이렇다. 첫 번째 사물의 현출체계가 일단 (어떤 이미지를 여기 이 사물의 이미지로 파악하는 최초의 파악과 더불어 확립되는) 키네스테제 배정을 얻은 후에, 이에 상응하는 다른 사물의 같은 현출에는 다른 키네스테제 색인화(Indizierung)가 대응한다. 이 현출에 이르려면, 우리는 먼저 (동일한 키네스테제 감각들로 소급 인도하는 순환 경로가 아닌) 어떤 키네스테제 경로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키네스테제 색인화를 제외하면, 양자의 현출체계는 완전히 같다. 두 사물이 하나의 유일한 세계(하나의 공존 통일체)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로부터 다른 것으로 (키네스테제에 의해 동기화되는) 경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때 물론 두 사물이 동시에 하나의 장에서 현시되는 현출도 가능하고, 통일적 정지 다양체의 본성에 의거해 가능해야 한다. 이 경우에 이들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두 사물 사이에 다른 사물이 없기 때문이다.) (운동에서의 다름과 같음 : 서로 다른 키네스테제 색인화, 하나로부터 다른 것으로 키네스테제 경로를 따라 나아감. §82 위치 변화인 운동과 이에 대응하는 키네스테제 동기화)

 

이미 말한 것처럼, 운동이 (내용이 동일한 사물의) 위치변화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요청에는, 키네스테제 정황의 배정 양상의 연속적 변화를 규제하는 어떤 법칙성이 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사물 현시가 (위치가 변하지 않는 경우와는) 다른 키네스테제 정황에 배정되어 현출될 뿐만 아니라, 매 위상마다 (체계적으로 폐쇄된) 하나의 완전한 정지 다양체가 상응하고, 매 위상마다 (연속적으로 변화된) 하나의 정지 다양체가 상응한다. [...] 변화하는 사물(그것도 단지 운동하는 사물)에 속하는 현행 현출 계열은 무한히 많은 가능 현출 계열들 중 하나이다. 대상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동일 운동을 무수한 입지들에서 볼 수 있으며, 이 운동에 대해 무한히 많은 위치들을 점유할 수 있다. 이는 무한히 많지만, 그 자체로 닫힌, 키네스테제 정황의 가능성들이다. [...] 그러나 이러한 각 현출 계열에 속한 현출들은 (임의의 위치에 있는) 정지 사물에도 속하며, 이들로 이루어진 각각의 연속적 현출 연관도 정지 사물에서 가능한 현출 연관들의 체계에 속한다. 정지와 변화의 차이는 오직 키네스테제 배정에 있는 것이다. (운동을 규제하는 법칙성 : 매 위상마다 체계적으로 폐쇄된 하나의 정지 다양체가 상응. §82 위치 변화인 운동과 이에 대응하는 키네스테제 동기화)

 

사물이 멈춰 있을 때 나 자신도 절대적으로 멈춰 있다면, 현상학적으로 말해, 나는 키네스테제가 항상적인 채로 동일 이미지를 계속 가진다. 그러나 사물이 움직이더라도 동일 이미지를 계속 가질 수 있다.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추적하면서 몸을 움직인다면(즉 특정 키네스테제 진행을 연출한다면) 그런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지속 이미지에 기초하여, 키네스테제가 항상적이면 사물이 멈춰 있다고 판단하고, 키네스테제가 변화하면 사물이 움직인다고 판단한다. (동일 이미지를 가지는 경우 구별 : 대상과 신체가 같이 정지한 경우와 같이 움직이는 경우. §82 위치 변화인 운동과 이에 대응하는 키네스테제 동기화)

 

그러나 운동의 직관은 정지로 해석될 수 있고, 정지의 직관은 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른바 감각적 착각(Sinnestäuschung)의 어떤 유형을 떠올린다. 물론 모든 위치 착각 및 운동 착각은 동일한 현출 다양체가 움직이는 것에 속할 수도 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에 속할 수도 있다는 데에서 기인할 수 있지만, 오직 거기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키네스테제 진행을 스스로 움직임(sich Bewegen)’으로, 자아 신체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고, 하물며 움직여짐(Bewegtwerden)’의 현출군들은 더욱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자는 나는 (기차 객실 같은) 차를 타고 간다.”와 같은 경우이다. [...] 하지만 여기에서 강조할 점은 차를 타고 갈 때 내 몸과 동승인의 운동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차의 주위가 움직이는 것을 본다. [...] 내 몸에 관련해서는, 나는 몸의 보이는 부분들이 멈춘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차에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본다. 후자는 객실에 앉아서 발이나 손을 올리는 등의 경우에 그렇다. (연구 지대의 확장 : 스스로 움직임과 움직여짐. §83 신체가 스스로 움직임과 움직여짐. 신체몸체의 키네스테제적 구성의 한계)

 

방금 언급한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분적으로라도 역시 현출하는 사물인) 몸도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자아가 눈만 있고 몸은 없는 유령(Geist)인 양 다루었다. [...]

(Leib)은 일단 다른 사물처럼 하나의 사물이다. 몸은 (그 정도는 제한적이지만) 다른 사물처럼 구성되기 때문이다. [...] 자기 몸(Leib)을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자기에게 마음대로 다가가거나 멀어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현시매체에 기초하여 같은 파악 방식을 수행하여) (Leib)을 몸체를 지닌 사물(körperliches Ding)로 보는 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이런 것들로도 충분하다. (연구 지대의 확장 : 몸체를 지닌 사물로서 신체. §83 신체가 스스로 움직임과 움직여짐. 신체몸체의 키네스테제적 구성의 한계)

 

물론 이[몸을 몸체를 지닌 사물로 보는 데]는 특수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언제나 필연적으로 시각장 테두리에서 사라지고 이 테두리를 넘어서서 결코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미 근본적 비정상성들이 드러나는데, 이 비정상성(Abnomalität)들이 몸(Leib)이 현출하는 사물이면서도 여타 사물들과는 다르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보자. 세계의 모든 사물은 나로부터 멀어질 수 있지만 내 몸(Leib)만은 그럴 수 없다. 나는 몸의 보이는 부위로 접근하거나 그로부터 멀어질 수 있지만(즉 유관한 크기변화 변양 및 선회변양이 여기에서도 경과하지만), 아주 제한적인 정도로만 그렇다. [...] 오히려 몸(Leib)에 속하는 이미지 다양체는 다른 사물들에 대비하여 특출한 키네스테제 동기를 지닌다. (가령 걷거나 뛰기, 아니 스스로 운동함 일반이라는 표제 아래의) 키네스테제 변화 계열은 말하자면 세계 전체를 흐르게 하고, (만일 세계가 멈춰 있다면) 이 정지 다양체의 흐름을 흐르게 한다. (신체의 주요 특징 : 시각장 테두리를 넘어 사라짐, 내가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불가능(제한적으로만 가능), 세계 전체(의 이미지)(선경험적 공간성에서) 흐르게 함 (기타 특징은 해당 문단 참고). §83 신체가 스스로 움직임과 움직여짐. 신체몸체의 키네스테제적 구성의 한계)

 

그러니까 내 몸(Leib)과 움직이는 다른 대상에의 상대적 위치가 유지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때로는 나는 스스로 움직인다.” 즉 어떤 키네스테제 진행이 일어나고, ‘외부세계의 이미지 다양체의 흘러감이 여기 대응한다. [...] 키네스테제 감각들은 신체 운동들과 항상적으로 결합한다. 즉 나는 팔을 들면 이러저러한 감각을 가진다. [...] 그러니까 키네스테제 감각들은 한편으로는 다른 사물들 및 몸의 사물현출에 구성적으로 기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에 정위된 감각들로도 기능한다. 이러한 이중의 파악은 어떤 것인가? 어쨌든, (키네스테제 관계가 변하는 와중에도, 대체적이고 전체적으로 동일한 현출 방식으로 나타나는) 나의 신체(Leib)나와 더불어움직인다.

[...] 이처럼 다른 대상과 평행하게 움직이고 함께 달리면 (바로 양측의 이미지가 같이 경과한다면) 나는 이 대상에 대해 같은 위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함께 움직여짐’, ‘함께 위치를 유지함의 구성은 키네스테제 정황의 변화를 매개로 일어나는 것이다. (신체와 다른 대상의 상대적 위치 유지 방식 1 : 다른 대상과 평행하게 움직임 - 키네스테제 정황의 변화를 매개로 함께 움직여짐의 구성 / 추가 연구 가능성 - 키네스테제 감각에서 이중파악과 정위감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촉감각의 이중파악과 정위감각과 어떻게 다른가? 키네스테제 감각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시하는 감각이 아님. 지금은 촉각의 매개를 받은 키네스테제 감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 / 추가 연구 가능성 : 내가 신체인데 신체가 나와 더불어 움직인다는 표현은 조금 이상함. 그래서 나와 더불어라고 ‘’안에 넣어 표현한 듯. 신체에 있어 후설의 관심은 단순히 그것이 나임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물들처럼 사물임에 있음. 자아와 따로 사물로서 생각될 수 있는 신체를 고려하다보니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임. 이런 텍스트적 전거들을 들어 후설이 심신이원론적 문제에 빠진다느니 하는 연구자들은 후설이 해명하고자 했던 문제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스스로의 해명 부담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 §83 신체가 스스로 움직임과 움직여짐. 신체몸체의 키네스테제적 구성의 한계)

 

2) [...] 그러나 내가 마차 안에 앉으면, ‘나는 마차와 더불어 움직이지만키네스테제 변화는 없다. 우선, 키네스테제 정지는 [마차의] 이미지 정지와 결합하여 대상 정지를 동기화한다. 여기에서 나의 키네스테제 정지는 [마차 밖의] 주위의 이미지 운동과 결합되고 마차 및 내 몸의 이미지 정지와 결합된다. [...] 현출 계열들은 이때 양측에서[마차 옆에서 달려서 움직임과 마차에 탄 채 움직임에서] 정확히 동일하며, 다만 달림이라는 키네스테제 동기화 대신에, 마차의 흔들림이나 바퀴가 굴러가는 소음 등만 있는 것이다. [...] 정상적인 경우에는 키네스테제 정황(이제까지 그렇게 불렀던 감각 복합체)이 수행하는 기능을 이제 다른 정황이 수행한다. 그러나 아마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이 정황이 정상적 상황을 대리하는 정황으로 파악됨으로써 수행하는 것이다. (신체와 다른 대상의 상대적 위치 유지 방식 2 : 움직이는 다른 대상 안에서 움직여짐 - 대리하는 정황의 변화를 매개로 함께 움직여짐의 구성. §83 신체가 스스로 움직임과 움직여짐. 신체몸체의 키네스테제적 구성의 한계)

 

이에 대한 중요한 보충으로서, 상호소통(Wechselverkehr)이나 거울에 의한 간접적 파악 방식들도 등장한다. 나는 다른 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자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나의 키네스테제는 멈추고 내 몸은 움직이는 것으로 현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모든 다른 사물에게는 있는 어떤 지각 가능성들이 결여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나는 타자를 이입감지(Einfühlen)할 수 있고, 그의 진술을 나의 진술과 관련시키거나 나의 진술을 그의 진술들과 관련시킬 수 있다. 즉 그의 운동 현출들에 대한 그의 진술과 그가 움직이고 움직여짐을 내가 발견함과 이 발견 방식에 대한 나의 진술을 관련시킬 수 있다. (신체에 대한 어떤 지각 가능성들의 결여를 보충하는 간접적 파악 방식 : 이입감지 상호소통이나 거울에 의한 파악 / 추가 연구 가능성 - 이념들2에서 등장한 거울을 통해 신체를 파악하는 방식이 여기서 미리 등장. 나의 신체를 타인지각인 이입감지를 통해 로 이입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재밌는 부분. §83 신체가 스스로 움직임과 움직여짐. 신체몸체의 키네스테제적 구성의 한계)

 

결어

 

사물성 일반의 본질에는, 어떤 현실적이거나 가능한 현출 다양체에서 구성되는 동일한 지향적 통일체임이 속한다. 그리고 그 있음(Sein)과 그때그때의 어떠함(Sosein)에 있어서 (그때그때 동기화되는 통제된 현출 연관에 있어) 증시되는 동일한 지향적 통일체임이 속한다. 그러나 이 연관은 서로 일치하고 서로에게서 충족되는 현출들의 연관이며, 이 현출들은 이들을 관통하는 믿음 의식에 의해,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정립의식이나 존재의식에 의해 담지된다. (사물성의 본질 : 어떤 현실적이거나 가능한 현출 다양체에서 구성되는 동일한 지향적 통일체, 그때그때 어떠하게 있는 것으로 증시되는 동일한 지향적 통일체.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

 

비존재(Nichtsein)는 다름(Anderssein)이나 변함(Geändertsein)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비존재에서는, 다른 식으로 정립된 존재의 법칙성이나 견고한 확실성에서 정립된 존재의 법칙성에 끼워지지 않는 현출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현행적으로 경과하는 현출 계열 및 현행적으로 포괄하는 현출 연관으로 조화롭게 흘러들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아 유일한 조화로운 사물 연관 통일체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 현출 계열과 현출 연관들을 스스로 지시하는 현출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이미지 허구(Bildfiktum)가 그렇다. 벽에 그림이 걸려 있다. 풍경이 (지각의 방식으로) 현출한다. [...] 그러나 이와 더불어 풍경은 (아무리 지각에 의해 현출하더라도) 허구(Fiktum), 존재하지 않는 것(Nichtseienden)으로 강등정립(Herabgesetzt)된다. , , ‘벽에 걸린 그림이라는 물리적 사물들이 서로 갈라지며, 서로 구성되는 저 현출 계열은 (충족하는 확실성이 나아가면서) 첫 번째 확실성을 입증한다. [...] 이 허구는 벽이나 방과 더불어 하나의 조화로운 사물성을 이루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허구임이 드러난다. (비존재의 본질 : 존재의 법칙성에 끼워지지 않는 현출 / 추가 연구 가능성 여기서 후설은 그림 속 풍경이 단지 삼차원적 몸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기보다 그것이 다른 사물들과의 조화로운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함. 이러한 조화로운 사물성에 대한 지적은 몇 년 뒤 후설의 이념들시리즈에 이르러 등장하는 사물 간 인과성에 기반한 물질적인 것의 층위를 예비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

 

[‘비존재라는] 이 표현이 이미 시사하는 것처럼, 이러한 비존재의 척도가 존재에 있다, 그리고 미리 주어진 존재에 맞서는 충돌만 이 추정이 (자신의 권리를 잃고 이 추정된 존재를 허구로 드러내는) 한갓된 추정에 불과함을 가능하게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daß absolut nichts sei), 그리고 모든 현출 존재가 한갓된 허구, 즉 공상, 환각, 꿈이라는 것은 배리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물론, 존재가 없다면 비존재도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포착된 것처럼, 존재를 사물의 존재로 해석하여, 사물의 존재 없이는 사물의 비존재도 없다고, 실재없이는 비실재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p1 비존재의 척도가 존재에 있다면, 존재 없이 비존재만 있을 수는 없다. p2 비존재의 척도가 존재에 있다. c 따라서, 존재 없이 비존재만 있을 수는 없다. / 존재에 대한 하나의 해석으로서 실재(사물의 존재).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

 

우리는 모든 비실재성은 그 자체로는, 그것에 속하는 믿음경향성을 (존재를 존재한다고 정립하는 더 확고한 믿음에 비추어) 산산조각 내는 충돌에 의해 드러남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필연적 사태인가? 현출연관들은 사실적으로는(de facto) 일관적 충족 통일체가 (지향적으로 정립된) 사물성을 계속 존재하며 존재했던 것으로서 견지하도록 허용하는 방식으로 경과한다. 그 지향적 초기정립들이 (그 자체 조화로운) 나머지 현출 계열들에 끼워지지 않는 현출 계열들이 이제 그 사이에 끼어든다. (계속 타당한 실재들, 믿어지는 실재들, 확실성의 방식으로 정립되고 계속 입증되는 실재들이라는) 넓은 배경 위에서, 비정상적 현출들이 부각된다. 이들은 허구들을 구성하는데, 이 허구들은 때로는 믿음에서 정립되지만 믿음에서 견지되지는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이 진전함에 따라 그에 대한 믿음이 부서지고 믿지 않음으로 반드시 옮아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가? 모든 지각이 결국 실재의 환상(Realitätillusion)일 수는 없는가? 한 시간점 다음부터는 조화로운 충족이 모두 중단되고 현출계열들이 서로 뒤섞여서, 어떠한 정립된 통일체도 (어느 구간에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입증되지만 결국 다시 폐기되는 것조차) 결국 유지될 수 없음은 불가능한가? 달리 말해,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파악들도 해소되어야 함은 분명하기 때문에) 심지어 모든 충족이 일반적으로 중단되고 현출흐름 전체가 무의미한 감각들의 한갓된 혼란(Gewühl)으로 해소됨은 불가능한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의 세계가, (유념해야 하듯이) 사물의 세계인 실재하는 세계(reale Welt als eine Dingwelt)가 있어야 한다는 절대적 필연성(absolute Notwendigkeit)이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간파할 수는 없다. (사실적으로는 실재(사물, 사물세계로서 실재세계)가 있지만, 필연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 모든 실재는 환상일 수 있다.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

 

물론 무는 있을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러나 한갓된 감각들의 혼란’, (선경험적 시간의 잇따름에서 비합리적으로[unvernünftig] 이어져서) 어떠한 사물 파악도 그 안에서 획득되고 유지될 수 없는 뒤죽박죽(Durcheinander), 말하자면 한갓된 감각의 혼란은 절대적 무가 아닌 것이다. 다만 그 안에는 사물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왜 하나의 세계가 존재해야 하고 존재해야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을 나는 실로 통찰하지 못한다. [...] 그래서 우리는 현상학적 혼란의 가능성이야말로 유일하고 궁극적인 존재이며, 이 혼란은 나와 너도 없고 물리적 세계도 없는, 한마디로 엄밀한 의미에서 실재가 없는 무의미한 혼란임을 알게 된다. (유일하고 궁극적인 존재로서 현상학적 혼란의 가능성, 이에 따른 절대적 무의 부재 필연성.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는 그 있음(Dasein)과 어떠함(Sosein)에 있어서 비합리적 사실(Faktum)이고, 이것의 사실성(Faktizität)(원주)은 오로지 동기 연관들의 견실함에 기인한다. 이 동기 연관들은 앞서 언급한 모든 가능성을 난잡한 가능성으로, 사상누각의 근거 없는 가능성으로 현출하게 한다. 다른 한편 (그 안에서 도대체 개별 실재들만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료로 등장하는 모든 것이 여기 기여하는) 세계의 존재는 유일하게 이성적인 가능성이며 (비록 선험적으로 주어지지는 않으나) 후험적으로 정초된 가능성이다. [...] 모든 지각된 실재(사물적 실재[dingliches Reale])는 아마 존재하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원리적으로 (지각과 기억에서 정립되는) 모든 사물적인 것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어쩌면 실재적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지각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이성 정립(Vernunftsetzung), 즉 정초된 정립이다. 이는 충돌에 의해 폐기된 것에도 해당된다. 모든 지각파악은 동기화된 것이며, 이 동기화에서 이 지각파악은 말하자면 존재를 선언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물론 지각에서의 이 이성 정립은 절대적 정립이 아니다. (세계의 있음과 어떠함에 관한 비합리적 사실성의 토대 : 동기 연관들의 견실함.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

*달리 말해 (현실적이고 가능한 현출 연관에 놓여서 견지되는) 사물 통일체 및 세계 통일체를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합리성 자체가 비합리적 사실일 것이다. (원주)

 

경험은 세계 존재를 보증하는 힘이다. 경험은 끊임없이 새로운 힘을 스스로에게서 길어내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로 통합하는 하나의 힘이다. 모든 지각은 그것이 지속한다는 것으로써 이미, 자신의 힘을 통합한다. 그리고 지각 연관에서는 모든 지각이 모든 지각에 의해 강화된다. 이는 (다양하게 얽힌 지각들의 여러 면과 빛살을 통일적으로 조화롭게 엮는) 모든 충족 계열들에 상응하여 일어난다. 존재를 정초하는 힘은 경험이 진행될수록 커지고, 경험과학이라는 형식으로 합리화(Rationalisierung)가 진행될수록 커진다. 합리화는 모든 예외를 규칙에 재편입시키고, 모든 비존재에게 어떤 존재에 속하는 가상을 배정한다. 그리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경험의 힘은 (이성 권력인) 압도적 권력으로 커져서, (현출연관에서 엄격하게 법칙적이고 통일적으로 구성되며 늘 더 완전하게 규정되는) 실재하는 세계의 비존재로 나아갈 가능성은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비이성적이고 근거 없는 가능성(바로 공허한 가능성)이 된다. 나는 사태를 늘 이렇게 보았다. (세계 존재를 정초하는 힘으로서 경험과 경험의 형식으로서 경험과학.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

 

사물은 어떤 현실적이거나 가능한 현출 다양체에서 구성된다. 이는 무슨 뜻인가? [...] (경험 통일성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현실적이고 가능한 지각들의 동기 연관에 있어서는, 가능한 지각들의 체계도 있다. 이 체계 안에서 문제되는 사물이 구성되며, 따라서 체계의 경과와 더불어 사물이 주어진다. 주어지지 않은 사물의 현실성은 따라서 가능성들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 가능성들은 빈 상상가능성이 아니라, 동기화에 의해 정초된 가능성이다. 현행 현출들이 이런저런 가능 현출들을 지시한다. [...]

각 상상은 가능성의 값을 가진다. 그리고 각 상상은 지각 가능성을 보증한다. 그러나 이 지각 가능성은 일단은 근거 없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근거 없는 상상된 가능성과는 아주 다른 것이, (각 지각에 함축된 가능성 같은) ‘현실적가능성, 정초된 가능성이다. 그때그때 등장하는 현출은 동기화하는 정황에서의 현출이다. (주어지지 않은 사물의 토대가 되는 동기화에 의해 정초된 가능성.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

 

하나의 가능성이 실현되었다는 가정이 다른 가능성들의 실현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상된 가능성들인 가능성들의 영토에서 어떤 선택이 일어나서 현실적 가능성들을 규정한다. 정황 K에서 E가 등장한다는 연상은 정황 K`에서 E`의 등장을 정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 등장의 현실적 가능성을 정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연상은 KK`로 이행한다는 추가적 연상이 이루어진다면 EE`로 반드시 이행할 것이므로, E`가 반드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을 정초한다. 이러한 반드시 ……할 것이다(müßte)’는 절대적인 반드시 ……한다(muß)’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적 의미에서의, 경험적 동기화의 의미에서의 반드시 ……한다이다. 모든 현실적 가능성은 현실성의 연상하에서의 가능성이다. [...]

이는 계속 나아간다. 우리가 이미 현실적 가능성을 가진다면, 즉 현실적 연상들에서의 가능성을 가진다면, 이 가능성은 다시 다른 가능성들에 어떤 규칙을 지시할 수 있다. 만일 x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면, y도 가능하다.”라는 형식의 가언명제가 이러한 가능성을 표현한다. 또한 x가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연상에서는 이에 의존하여 y도 현실적 가능성이 되어, x의 실현은 우선적으로 y를 동기화되는 가능성으로 만든다. 여기에서는 계속 의존적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상상된 가능성 혹은 한갓된 가능성 일반이라는 방식에서의) 지각 가능성이 아니라, 정립된 현실성에 의존하는 가능성이다. 이런 가능성은 (정립된 현실성에 의해 동기화되고 보충하는 정황들의 추정적 실현에 의해 동기화되어서) 동기화되는 현실성으로 이행한다. 이것이 현실적 현존을 지각 가능성들 체계와 관계 지을 때 의미하는 바이다. (의존적 가능성 : 현실성의 연상하에서 하나의 현실적 가능성의 가정적 실현이 규정 혹은 지시하는 다른 현실적 가능성. §84 실재적 현존과 실재적 가능성)